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화

잊힌 시간의 흔적

서윤은 익숙한 커피 향이 가득한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저녁, 마지막 손님마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계산을 정리하는 그녀의 손길은 기계적이었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마른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은 그날의 기억을 쉬지 않고 흔드는, 그런 눈이었다.

손안의 머그잔에서는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잔처럼, 서윤의 마음에도 어떤 메마름이 있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이름은 목구멍에 걸려 끝내 소리 내어 부를 수 없었다. 지우. 그 이름은 아직도 서윤의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뽑아낼 수 없는 가시 같았다.

겹쳐지는 그림자

5년 전, 그날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눈송이 아래, 지우는 두 손 가득 눈을 모아 서윤의 코끝에 살짝 묻혔었다. 서윤이 꺄르르 웃으면, 지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환하게 웃었다.

“서윤아, 우리 언제든 힘들어지면, 이 눈처럼 깨끗하고 반짝이는 약속을 기억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자. 그때는 꼭, 서로의 꿈을 이룬 모습으로.”

그 약속은 어린 날의 맹세처럼 풋풋하고 설렜지만, 동시에 세상의 무게를 전혀 알지 못했던 순진한 다짐이었다. 현실은 잔혹했고, 꿈을 향한 길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가시밭길이었다. 지우는 음악을 하겠다며 홀연히 떠났고, 서윤은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와 병환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의 꿈은 조용히 빛을 잃어갔다.

오늘도 서윤은 자신의 그림들을 한 번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남이 시킨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가끔은 카페 벽에 걸린 낯선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알 수 없는 질투와 허무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뜻밖의 소식

“서윤 씨, 아직 안 갔어요?”

늦은 시간, 카페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들어섰다. 서윤의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늘 서윤에게 따뜻한 격려를 건넸다.

“네, 마무리할 게 좀 남아서요.” 서윤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매니저는 따뜻한 코코아를 내밀며 서윤 옆에 앉았다. “오늘 낮에 잠깐, 아는 기자랑 통화했는데… 서윤 씨한테 흥미로운 소식이 될 것 같아서요.”

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니저는 휴대폰을 꺼내 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제목은 이러했다.


<신인 작곡가 ‘윤’의 겨울 감성 미니 앨범, 차트 역주행 돌풍>

서윤은 무심히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윤’.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기사 속 인터뷰 사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인물은 분명 지우였다. 짙어진 눈매와 조금 더 날카로워진 턱선, 하지만 그 미소는 분명 서윤이 기억하는 지우의 미소였다. ‘윤’이라는 이름은 그의 어릴 적 별명이었다.

“정말 놀랍죠? 무명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데, 이번 앨범이 대박이래요. 특히 타이틀곡 ‘눈꽃 편지’는 정말… 듣자마자 첫사랑이 생각나는 곡이랄까?” 매니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우는 꿈을 이루었다. 그들의 약속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하지만 자신은? 서윤은 한 번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낡아가는 스케치북과 물감들을 떠올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지우는 환하게 웃고 있는데, 서윤의 세상은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는 어느새 눈발이 더욱 굵어져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그 하얀 풍경 위로 지우의 환한 미소가, 그리고 약속의 조각들이 칼날처럼 날아와 서윤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첫눈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과연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더 가혹한 현실이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