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이진우의 세상은 스무 평 남짓한 아파트로 수렴했다. 13층, 1301호.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신도시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안식처였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면, 익숙한 공기 내음과 함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 푹신한 소파,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던 작은 식탁. 이 모든 것이 그의 일상이었고, 평온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부터인가, 진우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출근 전 분명히 식탁 위에 두었던 열쇠가 현관 신발장 위에 놓여있거나, 침대 협탁의 책이 페이지가 뒤바뀐 채 발견되곤 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워낙 건망증이 심한 편이라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들은 점점 빈번해지고 기이해졌다.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작업을 하다가도, 뒤돌아보면 분명히 닫혀있던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컵은 제멋대로 싱크대에서 거실 바닥으로 이동했고, 냉장고 문은 한밤중에 쿵, 하고 닫히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바람이겠거니, 윗집 소리겠거니, 수도관이 노후되어서 그렇겠거니, 온갖 합리적인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그러나 그의 이성적인 설명들은 점차 무력해졌다.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주였다. 진우는 주말을 맞아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로 욕실로 향하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식탁 위에서 공중으로 떠오른 숟가락이었다. 은색 숟가락은 느릿느릿,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것처럼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딸랑’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떨어졌다.
“젠장!”
진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굳게 닫힌 창문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바람일 리 없었다. 이웃집 장난일 리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이건 분명 이상 현상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거실을 뛰어다니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혹시 숨겨진 카메라라도 있나,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나. 그러나 그의 아파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고, 온전했다. 온전한 만큼, 불길했다.
그때부터 진우의 아파트는 ‘안식처’가 아닌 ‘감시자’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편히 잠들지 못했고, 혼자 집에 있는 것을 꺼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폴터가이스트’를 검색해봤지만, 대부분은 섬뜩한 이야기나 비과학적인 루머뿐이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희 집 숟가락이 날아다녀요’라고 말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리고 어제. 가장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 진우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밤 11시,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할 참이었다. 그때,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엽이 풀린 듯 시침과 분침이 제멋대로 돌더니, 이내 시계 전체가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 사이로 배터리가 굴러다녔다. 진우는 얼어붙은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실의 불빛이 깜빡이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는 식탁 의자 중 하나가 삐걱이며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는 마치 누군가 앉으려는 듯,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끌려왔다.
진우는 숨도 쉬지 못했다. “누구…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부엌에서 식칼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어둠 속을 찢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고 벌벌 떨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침이 밝았다. 끔찍한 밤이 지나고 해가 떴지만, 진우의 아파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깨진 시계 파편, 뒤집힌 소파, 부엌에서 튀어나온 식칼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그는 부서진 시계 잔해 위를 조심스레 걸어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껏 피폐해져 있었다. 푹 꺼진 눈, 창백한 얼굴. 영락없는 폐인이었다.
그는 샤워를 하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먼저 쏟아지더니, 곧 뜨거운 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뜨겁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절해도, 아무리 잠그려 해도 수도꼭지는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뿜어냈다.
“이게 또 왜 이래!”
진우는 수도꼭지를 잡아 뽑으려 애썼다. 헛짓이었다. 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욕실을 뛰쳐나왔다. 안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런데 안방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리고 밀어붙여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안에서 잠근 것처럼. 진우는 황망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 아무도 없잖아! 문 열어!”
답은 없었다. 그때,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거실의 한쪽 벽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벽이 아니라 그 벽을 이루던 석고보드와 벽지, 페인트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 마치 동굴 입구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그 안쪽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오래된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이게… 뭐야?”
진우는 넋을 잃고 그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파트는 이제 더 이상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침입자는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집 그 자체가 침입자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의 아파트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며, 가구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의 안식처는 이제 탐험해야 할 미지의 영역, 끝없이 변형되는 기괴한 던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빛이 나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어쩌면 탈출구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린 채. 벽 안쪽에 생긴 동굴 같은 통로는 예상보다 깊고 길었다. 발밑에는 부서진 석고 조각과 알 수 없는 파편들이 밟혔다.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습해졌다.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13층 아파트의 한복판인데, 마치 지하 동굴이라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통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의 끝에는 흐릿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있었다. 녹슨 철문이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은 열렸지만,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은 진우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그의 거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바뀐 거실. 천장이 바닥으로, 바닥이 천장으로 뒤집힌 공간. 가구들은 중력을 잃고 둥둥 떠다니거나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소파는 천장에 붙어 있었고, 식탁은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창문은 바닥에 박혀 있었고, 창밖으로는 그의 아파트 단지가 거꾸로 보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중력이 뒤틀리고 공간의 상식이 파괴된, 거대한 착시이자 환각이었다.
진우는 문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곳이 현실인가? 아니면 자신이 미쳐버린 것인가? 그는 손을 뻗어 허공에 떠 있는 의자를 만져보려 했다. 손끝이 닿기 전, 의자는 휙, 하고 방향을 바꾸더니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에게 장난을 치는 듯했다.
“재미있어…?” 진우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어?”
답은 없었다. 오직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 기괴한 아파트, 아니 이 던전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퍼즐이었고, 함정이었으며, 그의 모든 일상이 뒤틀린 채 존재하는 기괴한 미궁이었다.
진우는 거꾸로 매달린 소파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혼돈 속에서,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었다. 이곳은 미로였고, 덫이었으며, 그의 모든 일상이 뒤틀린 채 존재하는 기괴한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던전의 유일한 탐험가이자, 동시에 영원히 갇힌 존재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박힌 창문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보이는 바깥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는 그 평화로운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딸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닫혀 있던 철문이 아주 조금,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한없이 소름 끼치는 어둠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미지의 영역을 탐험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이곳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아파트 던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