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 바닥에 박힌 마법 램프의 희미한 빛이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흔들렸다. 이진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발밑에서 찰박이는 물웅덩이가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림은 그에게 익숙한 자장가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그림자 던전의 17층, 미로와 함정으로 점철된 죽음의 미궁. 그리고 그에게는 복수의 길이었다.
“크윽…”
왼쪽 다리의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인간의 살과 뼈가 아닌, 차가운 강철과 마력으로 만들어진 의족이 던전의 냉기에 반응하는 듯했다. 그 고통은 마치 오래된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아니,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 상처를 남긴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지고 있었다. 2년 전, 바로 이 던전에서 그날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때도 이렇게 차가웠지. 너의 등도, 너의 눈빛도.*
진우는 눈을 감았다. 그때의 자신은 순진했다. 강민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믿었던 동료. 언제나 그의 뒤를 지켜주고,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던 민준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이 던전의 심층에 도달하여, 숨겨진 유물을 손에 넣는 것. 그리고 그때, 놈은 그를 버렸다.
아니, 버린 것이 아니었다. 제 손으로 지옥불에 밀어 넣었다. 거대한 오우거 무리가 길을 막아서고, 퇴로가 끊긴 절망적인 상황. 민준은 그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진우야, 내가 문을 열게! 넌 저들을 막아!” 그 말에 기꺼이 몸을 던졌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잠겨 있던 유적 문을 열고 홀로 도망쳤다. 거대한 바위가 그의 탈출로를 막아섰을 때, 진우는 보았다. 문틈으로 스쳐 지나가던 민준의 얼굴에 스쳤던 섬뜩한 미소와, 그 뒤에 보였던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를.
왼쪽 다리가 뜯겨나가고,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진우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 그는 생존의 마지막 발악을 했고, 그때 발현된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살렸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은 그에게 축복이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 저주였다.
“크르릉…”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스며 나오던 괴물들이 진우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그림자 늑대, 던전의 하급 몬스터지만 떼로 다니며 방심한 모험가들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존재들이다. 진우의 붉게 타오르는 눈빛에 놈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굶주린 본능이 더 강했다.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선두의 늑대.
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의 송곳니가 그의 목덜미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몸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쉬익!
섬광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림자 늑대가 공격했던 자리에 진우는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늑대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우의 손에 들린 단검, [어둠 추적자]가 늑대의 목덜미를 깊숙이 갈랐다. 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그림자가 칼날을 타고 늑대의 생명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림자 습격]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어둠 흡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진우는 몸을 낮춰 그림자처럼 다른 늑대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예전의 그는 아니었다. 섬세한 컨트롤과 빠른 판단력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던 ‘정석’의 모험가는 사라졌다. 이제 그는 오직 ‘효율’만을 추구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피해를 입히고, 적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학살자.
콰득! 콰드득!
검은색 그림자가 늑대들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놈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피와 그림자가 뒤섞이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진우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마치 오랜 시간 조각된 얼음처럼,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고통과 어둠은 놈들이 그에게 안겨준 선물이었다. 이제 그는 그 선물을 놈들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마지막 그림자 늑대가 쓰러지고, 진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2년 동안 지옥보다 더한 수련을 거쳤다. 던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 결과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그를 버렸던 동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
진우의 시선이 늑대 무리가 쓰러졌던 곳으로 향했다. 그림자 늑대는 흔히 희귀한 전리품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녀석들이 서식하던 바위틈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진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진우는 차가운 돌을 긁어내며 틈새에 박힌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낡고 해진 가죽 주머니였다.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주머니였지만, 주머니를 묶은 매듭이 진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닳아 해졌지만, 그 매듭은 분명했다. 한때 그와 민준이 함께 만들었던, 그들만의 암호 같았던 매듭. 특정 던전에서만 통용되던 그들만의 표식이었다.
진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머니를 열자, 마른 마력이 응축된 수정 조각과 함께 낡은 양피지 한 장이 튀어나왔다. 양피지는 던전의 습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진우는 그것을 펼쳤다.
[이곳은 예정보다 빠르게 돌파되었다. 새로운 경로를 확보했으며, ‘심연의 칼날’이 예상치 못하게 반응하고 있다. 19층으로 이동. – 민준]
짧은 메모였다. 하지만 진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민준.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심연의 칼날’은 2년 전 그들이 찾아 헤매던 유물의 이름이었다. 민준이 그를 배신하고 홀로 차지했던 바로 그 유물!
*네놈… 아직도 이 던전에 있었던 거냐!*
진우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준은 유물을 손에 넣은 채 여전히 이 던전의 더 깊은 곳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강민준….”
진우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목소리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양피지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찢어질 듯 바스러지는 양피지 조각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기다려라. 네가 이 던전에서 얻은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로 뺏어갈 테니. 그리고… 네가 빼앗아 간 내 모든 것을, 곱절로 되갚아줄 테니.”
의족이 거친 소리를 내며 돌 바닥을 박찼다. 진우는 미련 없이 17층의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민준의 흔적을 찾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흔적을 따라가 놈의 심장을 찢는 것뿐이었다. 핏빛 복수의 칼날이 드디어 그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붉은 눈이 더욱 선명하게 타올랐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의 그림자를 좇고 있었다. 강민준, 너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