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검은 심연의 조각
호라이즌 호의 함교는 고요했다. 창밖은 태초의 어둠이 지배하는 심연. 이름 없는 별들이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무의미한 반짝임을 흩뿌리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의 끝자락이었다. 카이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우주 지도가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푸른 선으로 표시된 항로가 한 점을 향해 뻗어 있었지만, 그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미탐사 영역 X-77’이라는 무미건조한 코드명만이 주어졌을 뿐.
“정말이지, 우주는 재미없는 곳이야.”
카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 시스템 내부의 작은 메아리처럼 울렸다. 벌써 세 달째였다. 웜홀 점프 이후 단 한 번의 항로 변경도 없이, 이 불길한 정적 속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의 척추에 박힌 신경 포트와 함선이 직결되어 있었다. 눈으로 보는 모든 정보가 뇌로 곧바로 전송되었고,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만으로 수백만 톤의 강철 덩어리를 제어했다. 이것이 ‘뉴로 파일럿’의 운명이었다. 우주선을 자기 몸처럼 다루는 대신, 우주선과 한 몸이 되어버리는 존재.
“재미있는 걸 찾으러 이 지옥 끝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카이.”
뒤편의 부함장석에서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 박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한쪽 팔 전체가 티타늄 합금으로 된 사이버네틱 의수였다. 정비 총괄인 그녀는 늘 불만이 많았지만, 그만큼 이 함선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옥 끝에 왔으면 뭔가 새로운 지옥이라도 있어야지. 똑같은 어둠과 똑같은 정적뿐이잖아.” 카이가 피식 웃었다. 그의 신경회로에서 피로도가 감지되었는지, 시스템이 자동으로 미량의 각성제를 혈류에 주입했다. “이러다간 블랙홀이 덮쳐도 지루해서 하품할 걸.”
그때였다. 카이의 시야를 가득 채운 우주 지도에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경고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미확인 물체 감지’ 신호였다. 시스템이 평소와 다른 강도로 진동했다.
“어, 이게 뭐야?”
카이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이 섞였다. 그의 시선이 자동으로 레이더 스캔 영역으로 향했다. 망원 센서가 잡아낸 지점은 가장 가까운 성계에서도 수천 광년 떨어진, 그야말로 허무의 한복판이었다. 자연적인 천체일 리 없었다. 이토록 고립된 공간에, 그 어떤 중력원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떠 있을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함장님! 시온 박사!”
카이가 다급히 외쳤다. 그의 신경회로를 통해 직접 전송된 정보는 이미 함교 전체에 공유되고 있었다. 잠시 후, 함장 이산의 침착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흘렀다.
“보고해, 카이.”
“장거리 스캔에 미확인 물체가 잡혔습니다. 크기는… 상당합니다. 대형 소행성군 정도로 보입니다만, 움직임이 없습니다. 완전히 정지해 있어요.”
“정지?” 제인의 의수가 탁, 하고 콘솔을 짚는 소리가 들렸다. “그 광활한 공간에서 뭘 기준으로 정지했다는 거지? 아무 중력원도 없는데?”
“바로 그겁니다.”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속도 0.00000001% 미만. 사실상 멈춰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 구성이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우주 지도의 오류처럼.”
문이 열리고 함장 이산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항해의 피로가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뒤이어 시온 박사가 흥분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비해 늘 엄청난 열정을 뿜어내는 천재 과학자였다.
“오류일 리 없어요, 카이! 오류라면 이렇게 선명하게 잡힐 리가 없죠!” 시온 박사가 흥분하여 카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이미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함장님, 이건 분명 인공적인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이거나요!”
“진정해, 시온. 카이, 탐침을 보내봐.” 함장 이산이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뇌에서 명령을 내렸다. 호라이즌 호의 외부에 장착된 소형 탐사용 드론들이 빠른 속도로 미확인 물체를 향해 날아갔다. 수십 개의 드론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며 스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드론이 보내온 영상이 재생되었다. 처음에는 흐릿한 검은 점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화면 속의 물체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대했다. 대도시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크기. 그리고 그 형태는… 기괴했다. 어떤 유선형도, 자연적인 곡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수학 공식으로만 존재할 법한 완벽하고 불길한 기하학적 형태였다. 거대한 검은 기둥들이 서로를 꿰뚫고, 다시 엉키는 듯한 모습.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빛과 정보를 흡수하는 듯한 완벽한 흑색이었다. 존재 자체가 공허를 찢고 나온 듯했다.
“이건… 외계 문명…?” 시온 박사의 목소리는 경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빛났다.
“에너지 반응은?” 함장 이산이 물었다.
“전무합니다, 함장님.” 카이가 대답했다. “탐침 드론들이 근접했습니다. 충돌 위험은… 없습니다. 물체가 드론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드론들은 물체의 표면에 거의 닿을 듯이 근접했다. 초고해상도 영상이 함교의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검은 물체는 마치 거대한 모노리스 같았다. 표면에는 미세한 결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매끄럽고, 완벽하게 검은색이었다.
“이건 대체 뭘로 만든 거지…?” 제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의수를 들어 스크린의 특정 지점을 확대했다. “이건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과도 달라요. 스캔 데이터에 따르면, 물질의 밀도, 구성 원소 모두… 측정 불가능합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물질처럼.”
그 순간, 카이의 신경 포트에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뇌를 직접 움켜쥐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그의 눈앞 홀로그램이 왜곡되며 일그러졌다.
“카이? 무슨 일이야?” 함장 이산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통증이….” 카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그의 뇌리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그림자, 끝없는 심연,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언어의 파편들.
동시에, 메인 스크린에 잡히던 드론들의 영상이 일제히 끊겼다. 모든 드론의 통신이 먹통이 되었다.
“드론이… 드론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카이가 외쳤다. 통증이 가라앉자마자 밀려오는 공포감에 온몸이 떨렸다. “흔적도 없이…!”
시온 박사가 스크린을 노려봤다. 검은 유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침묵 속에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침묵이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설마… 흡수된 건가요?” 제인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함장 이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카이에게 다가갔다. “카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해 봐.”
“그냥… 뇌를 쥐어짜는 듯한 감각이었어요. 그리고… 알 수 없는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저와 접촉했습니다. 유물이… 반응한 것 같습니다.”
카이가 말을 마치는 순간, 검은 유물의 표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완벽하게 매끄럽던 표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균열은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핏줄처럼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확실한, 보랏빛 섬광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불쾌했고, 생명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빛이었다. 빛이 새어 나오면서, 유물 전체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호라이즌 호의 선체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젠장…!” 제인이 비명을 질렀다. 함교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시온 박사는 넋을 잃은 듯 유물을 바라보았다. “이건… 일종의 반응이에요. 아니면… 깨어나는 걸까요?”
함장 이산은 결단을 내렸다. “전원, 후퇴 준비! 카이, 즉시 함선을 최대한 가속시켜 이탈한다!”
카이는 재빨리 뇌에서 명령을 내렸다. 호라이즌 호의 엔진이 최대 출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걸까.
유물의 균열은 더욱 커지고, 보랏빛 섬광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 사이로, 거대한 검은 심연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우주 자체를 삼켜버릴 듯한,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그 문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카이의 신경 포트에서 다시 한번 격렬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거대한 정신의 물결이 그의 의식을 강타했다. 수많은 이미지, 수많은 목소리, 수많은 감각이 그의 뇌를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우리는 너희를 보았다…*
*…너희의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이 심연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환청과 환각이 뒤섞였다. 카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눈은 동공이 풀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메인 스크린에는 거대한 검은 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그 문 안에서는, 이제까지 본 어떤 심연보다도 더 깊고 끔찍한,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라이즌 호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 검은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력장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의 힘 때문인지, 함선은 거대한 존재에게 이끌리듯 천천히 문을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함장님… 도망칠 수 없습니다…!” 카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끝없이 펼쳐진 검은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호라이즌 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심연의 끝에서, 셀 수 없는 눈들이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검은 문은 호라이즌 호를 완전히 집어삼킨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태초의 어둠과, 희미한 보랏빛 잔광뿐이었다. 우주 지도의 ‘미탐사 영역 X-77’은 다시 평온한 정적 속으로 잠겼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미지의 존재가 눈을 뜨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