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4월의 쌀쌀한 바람은 겉옷을 파고들어 온몸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내 안의 불타는 증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이곳이라니. 풋내 나는 과거의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이었다.
저기, 보였다. 햇살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 그때는 몰랐다. 저 미소 아래에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을 줄은. 이진혁.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악마.
유리창 너머, 캠퍼스 안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는 이진혁의 모습이 선명했다. 옆에는 늘 그랬듯, 그를 추종하는 몇몇 무리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나 같았던, 순진하고 어리석은 영혼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되돌아온 시간. 다시 얻은 기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아니, 되돌리는 것을 넘어, 네가 내게 안겨줬던 고통의 수십 배를 되갚아 줄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완벽하게.
창백한 손으로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늘 그랬듯, 환하고 능글맞은 미소가 그 입술에 걸렸다.
“오, 현우 아니냐? 웬일이야, 여기? 전공 수업 없는 날 아니었어?”
진혁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게 더 역겨웠다.
“어. 잠깐 들렀어.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어댔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연습의 결과였다.
“그래? 잘됐네. 마침 얘기할 것도 있었는데. 이리 와 앉아.”
진혁이 손짓했다. 옆에 앉아있던 동기들이 스르륵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치 진혁이 그들의 왕이라도 되는 양.
테이블 위에는 익숙한 디자인 스케치들이 놓여있었다. ‘프로젝트 아르카나’. 내가 밤낮으로 매달려 기획했고, 진혁과 함께 완성했다고 믿었던 우리의 첫 번째 성공작. 그리고 내 파멸의 시작.
“오늘 교수님께 발표할 거야. 대박 예감 아니냐? 현우, 너도 봤지? 우리 아이디어, 진짜 천재적이라고.”
진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눈동자에는 탐욕이 번득이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걸 열정이라고 착각했었다.
“응, 물론이지. 그런데… 스케치 보니까 문득 생각난 건데. ‘미래형 도시 생활 솔루션’이라는 컨셉은 좋지만, 핵심 기술 구현에 대한 부분이 좀 더 보강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그 ‘개인화된 에너지 관리 시스템’ 말이야.”
나는 스케치 중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진혁이 핵심이라고 밀어붙였던, 그러나 초기 단계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그 부분.
“응? 그게 왜? 우리가 제시한 방식이면 충분하다고 교수님도 그러셨는데.”
진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순간적인 당혹감. 놓치지 않았다.
“아니, 충분하다는 게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구현을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가진 기술로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예를 들어, ‘자가 발전형 전력 분배 알고리즘’ 부분 말이야. 초기 데이터 확보와 검증 과정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어. 혹시 교수님께 이 부분에 대한 심화 연구 필요성을 어필해보는 건 어때? 오히려 더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걱정하는 친구의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이 부분은 훗날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지점이었다. 진혁은 이 문제를 나 몰래 외주 업체에 맡겨 해결하려다 큰 손실을 보았고, 그때의 부담을 모두 내게 전가하려 했다.
“자가 발전형 전력 분배 알고리즘… 그거 우리가 나중에 보강하기로 한 거 아니었냐?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진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눈동자에 미묘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교수님은 늘 미래 지향적인 시각을 중요하게 보시잖아. 우리가 이런 부분까지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선 통찰력을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초기 단계에서부터 핵심 기술의 난제까지 꿰뚫어 보는 자세.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의 허를 찔렀다. 진혁은 늘 보여주기식의 화려한 아이디어에 집중했고, 실질적인 구현의 어려움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내 말은 분명 교수님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부분이었다.
“음…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진혁이 턱을 문질렀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미래에서 가져온 정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나태와 오만을 꿰뚫는 칼날이었다.
바로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키 큰 남자가 들어섰다. 우리 학과의 김 교수님이었다. 진혁의 얼굴에 다시 능글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교수님! 이쪽입니다!”
진혁이 손을 흔들었다. 김 교수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 자네들 먼저 와 있었군. 현우도 있네?”
김 교수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잠시 볼일이 있어 왔다가 진혁이 만났습니다.”
“잘됐네. 이진혁, 너 현우랑 같이 발표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 현우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김 교수의 말에 진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내가 함께했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도 늘 그랬다. 내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는 데 익숙한 자였다.
“아, 네. 현우도 많이 도와줬죠. 현우 덕분에 아이디어가 더 풍부해졌습니다.”
진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래. 현우는 늘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졌지. 혹시 진혁이가 설명한 ‘프로젝트 아르카나’에 대해 현우 자네는 또 다른 심화된 의견이라도 있나?”
교수님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네, 교수님. 방금 진혁이와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개인화된 에너지 관리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발전형 전력 분배 알고리즘’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초기 단계부터 이 부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나는 차분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미 나 때문에 자신의 ‘완벽한’ 발표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오호라? ‘자가 발전형 전력 분배 알고리즘’이라. 현우 자네, 그 부분까지 고민했나? 놀랍군.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이디어의 화려함에만 치중하는데, 역시 김현우 답군.”
김 교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나를 향한 그의 신뢰는 과거에도 두터웠다. 그걸 진혁은 질투했고, 결국 이용했다.
“그럼요, 교수님. 이 시스템은 단순히 에너지를 관리하는 것을 넘어, 미래 도시의 지속 가능한 생존력을 결정하는 핵심이 될 겁니다. 초기부터 이 알고리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면, 단순한 ‘솔루션’이 아닌 ‘미래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은근슬쩍 진혁의 아이디어를 ‘솔루션’으로 낮추고, 내 관점을 ‘미래 표준’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그 ‘미래 표준’에 반드시 필요한 난제를 언급하며 진혁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미래 표준이라! 현우 자네, 정말 기특하군. 이진혁, 현우 말대로 이 부분은 단순한 보강을 넘어선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해 보여. 자네 발표 자료에 이 부분을 좀 더 강조하고, 현우와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서 보완하도록 해. 아마 평가가 더 좋아질 걸세.”
교수님의 말이 떨어지자 진혁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는 내 의견을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보완’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받은 셈이 되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잘 알고, 그가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완벽한 연극이었다. 나는 그저 걱정하는 친구인 척,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만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진혁이 결코 예상하지 못할 독이 숨겨져 있었다. 저 ‘자가 발전형 전력 분배 알고리즘’은 그가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기술적인 난제였다. 결국, 그는 이 문제 앞에서 좌절하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터였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나의 복수극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진혁. 네가 내게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나는 이렇게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되찾을 것이다. 네가 가진 그 모든 것을 부수고,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을 내 손으로 찢어발길 때까지. 이 피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다.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쌀한 맛이 혀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내 안의 쓰디쓴 감정처럼. 하지만 그 쓰라림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미래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진혁은 여전히 허탈한 표정으로 교수님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어둡게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었다. 나의 처절한 복수극의 서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