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금속 벽은 시아의 손바닥 아래서 미약하게 떨렸다. 벨라리스 5번 구역의 거대한 폐기물 산은 늘 그랬듯 부유하는 먼지구름과 함께 죽은 행성의 숨결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삶’이란 녹슨 파편을 뒤져 한 줌의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와 동의어였다.
시아는 능숙하게 고물 광물 수집기의 동력 핵을 분리했다. 제국제 기기답게 부품 하나하나가 튼튼했지만, 이곳 벨라리스에서는 그마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일이 허다했다. 제국은 벨라리스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고, 남은 찌꺼기만 이곳에 버려두었다. 그리고 그 찌꺼기마저 제국의 허락 없이는 온전히 사용할 수 없었다.
“젠장, 또 이거야.”
시아의 옆에서 일하던 론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정화 필터를 던져 버렸다. 론의 얼굴에는 먼지와 기름때가 뒤섞여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짙은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렸다.
“이 더러운 필터 하나 사려면 내 한 달 벌이를 다 털어 넣어도 모자라. 도대체 제국놈들은 우리한테 뭘 더 가져가려는 거지?”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은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환경 정화세’라는 명목으로 행성민들의 식량 배급량을 반으로 줄였고, 이번 달에는 필수 부품에 ‘제국 유지 기여금’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세금을 붙였다.
그때였다. 찌이이잉—하는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하늘을 갈랐다. 제국의 징수함, ‘절대자’ 호가 저공비행하며 대기권을 흔들었다. 거대한 함선 그림자가 벨라리스의 황폐한 지면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징수함에서 내려온 제국 폭정군 병사들이 광장으로 거만하게 들어섰다. 검은색 강화복을 입은 그들은 한 손에 에너지 채찍을 들고 있었다. 폭정군 선두에 선 중위 계급의 장교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벨라리스의 게으른 시민 여러분! 오늘의 할당량이 채워지지 않은 자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어제부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밤샘 작업을 했지만, 제국이 매일같이 늘리는 할당량을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제일 먼저 가서 말해보겠어.”
광산 조합의 노인, 카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을 품고 있었다. 카이는 한때 제국의 엔지니어였으나, 벨라리스로 좌천된 후 행성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해왔다.
“중위님, 어제 갑작스러운 태양풍으로 채굴기에 문제가 생겨서… 오늘은 도저히 할당량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카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위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의 어깨에 붉은 줄기가 그어졌다. 노인은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다.
“변명은 필요 없다, 늙은이.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자는 징벌을 받아야 마땅해!”
중위는 다른 병사들에게 눈짓했고, 병사들은 거칠게 카이를 끌어냈다. 그들은 카이를 징수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광장의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였지만, 감히 제국군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러다가 모두 죽을 거야.”
론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시아의 눈동자에도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비슷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때, 시아의 낡은 통신기가 작게 울렸다. [오래된 암호로 해독된 메시지: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별들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십시오.’]
이 메시지는 최근 벨라리스와 주변 식민 행성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공유되던 것이었다. 제국의 감청망을 피해 아주 짧은 순간만 전송되는, 미약한 희망의 신호.
“더 이상은 안 돼.”
시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아의 눈에는 어떤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
그날 밤, 시아는 폐기물 더미 속에 숨겨진 낡은 오두막으로 론과 리나를 불렀다. 리나는 시아와 함께 자원 정제소에서 일하던 동료로, 겉보기엔 여리지만 뛰어난 해킹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 아저씨는 분명 징수함에 잡혀갔을 거야.” 시아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론이 답답한 듯 벽을 쳤다. “알아! 하지만 뭘 어쩌겠다는 거야? 우리 셋이서 제국 폭정군이랑 싸우겠다고?”
리나가 조용히 데이터 패드를 꺼냈다. “오늘 카이 아저씨가 잡혀가기 직전, 내게 이걸 넘겨줬어.”
패드 화면에는 복잡한 회로도와 함께 흐릿한 데이터 파일이 떠올랐다. “이건… 제국 항성계의 물류망 지도야. 그리고 여기에 표시된 지점들은… 제국의 보급창들.”
시아의 눈이 커졌다. “보급창? 제국 폭정군에 필요한 물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이지?”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 아저씨는 제국 물류망의 허점을 찾고 있었어. 가장 가까운 보급창은… 코볼 행성의 ‘사자성’ 요새야. 그곳은 제국군의 핵심 보급 기지이면서도, 의외로 방어가 허술한 지점이 있다고 해. 오래된 비상 통로가 있는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대.”
론이 비웃었다. “그래서, 그 보급창을 털자고? 우리 셋이서? 우리가 뭘 타고 갈 건데? 저 낡은 스크랩 더미를 타고 우주라도 날아갈 셈이야?”
시아는 폐기물 산 한가운데 버려진, 거대한 화물선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한때 제국의 자랑이었으나 이제는 뼈대만 남은 거대한 고철 덩어리.
“아니, 저걸 타고 갈 거야.”
***
삼 주 후, ‘자유의 날개’ 호는 벨라리스의 대기권을 뚫고 어둠 속으로 솟아올랐다. 화물선은 시아, 론, 리나의 손길을 거쳐 간신히 우주를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개조되었다. 외형은 여전히 낡고 투박했지만, 내부는 세 사람의 노력이 담긴 최첨단 기술로 채워져 있었다.
“젠장, 이 낡은 엔진은 꼭 내 심장처럼 뛰고 있군!” 론이 조종간을 잡고 흥분한 듯 외쳤다. 그는 과거에 뛰어난 파일럿이었으나, 제국의 불합리한 법 때문에 면허를 박탈당한 채 벨라리스에 갇혀 지냈다.
리나는 능숙하게 항성 지도를 조작하며 속삭였다. “제국 감시망을 피해서 초광속 항로에 진입하려면 지금이야!”
시아는 조종석 뒤편,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통신기를 조작했다. 카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른 식민 행성들에 전해졌던 희망의 신호를 재정비했다.
“알았어, 론. 리나, 카이 아저씨가 남긴 암호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줘. 코볼 사자성 요새의 비상 통로 보안 프로토콜은 일반적인 제국 시스템과는 다르다고 했어.”
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패드에 몰두했다. “카이 아저씨의 천재성은 녹슬지 않았군. 완벽한 백도어야!”
코볼 행성의 사자성 요새는 거대한 소행성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국의 최첨단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리나의 해킹과 론의 기묘한 조종술 덕분에 ‘자유의 날개’는 감시망의 틈을 비집고 요새의 외곽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시아, 비상 통로 입구를 찾았다!” 론이 외쳤다.
시아는 재빨리 화물칸으로 향했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했지만 위험했다. 리나가 해킹으로 비상 통로를 열면, 시아가 그곳으로 잠입하여 내부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론은 ‘자유의 날개’를 비상 통로 입구에 숨긴 채 대기한다.
“리나, 내 신호에 맞춰서 열어줘.”
시아는 강화복을 입고 통로로 뛰어들었다. 통로는 길고 어두웠다. 곳곳에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아는 비상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거대한 강철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통신기를 통해 리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열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시아는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자마자 경계 자세를 취했다. 사자성 요새의 내부는 예상외로 한산했다. 비상 통로는 요새의 가장 깊숙한 곳, 바로 보급품 저장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긴… 제국군 물자 집결지가 아니라, 뭔가 다른 곳이야.” 시아가 중얼거렸다.
그곳은 일반적인 보급창이 아니었다. 거대한 홀에는 수많은 액화 크리스탈 용기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어두운 액체가 가득했고, 그 액체 속에는… 작은 행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건… 행성 에너지 추출 장치야.” 리나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떨렸다. “카이 아저씨가 말했던… 벨라리스에서 사라졌던 그 행성 광물 정제 기술이 여기 있었어. 이걸로 제국은 약소 행성의 에너지를 강제로 뽑아내서 크리스탈에 저장하고 있었던 거야.”
시아는 분노에 휩싸였다. 벨라리스의 황폐화가 단순히 자원 채굴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은 행성의 생명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장고의 중앙 제어 패널로 달려갔다. 패널은 제국군 특유의 강력한 암호로 잠겨 있었다.
“리나, 이걸 뚫을 수 있어?”
“잠깐만… 아저씨가 남긴 암호가 이것까지 커버할 줄은 몰랐는데… 찾았다! 하지만 이걸 건드리면 요새 전체에 경보가 울릴 거야!”
“상관없어. 이 시설을 파괴해야 해.”
리나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잠시 후, 제어 패널의 화면이 푸른색으로 바뀌며 ‘작동 중지’ 메시지가 떴다. 동시에 요새 전체에 붉은 경보등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경보음이 귓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곳곳에서 제국 폭정군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아! 서둘러! 제국 전투함들이 우리를 포착했어!” 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중앙 제어 장치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행성 에너지 크리스탈을 발견했다. 그것은 벨라리스의 에너지였다. 그녀는 그 크리스탈을 조심스럽게 회수했다.
“나는 간다! 리나, 폭파 카운트다운을 시작해!”
시아는 비상 통로로 다시 몸을 날렸다. 뒤에서는 폭정군 병사들의 블래스터 총격이 빗발쳤다. 그녀는 간신히 ‘자유의 날개’ 호에 탑승했고, 론은 거친 솜씨로 함선을 비상 통로에서 이탈시켰다.
그때였다. 콰아앙! 요새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사자성 요새의 일부가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며 파편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어졌다.
“젠장, 잘했어!” 론이 환호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멀리서 거대한 제국 함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독 발렌의 기함, ‘황제의 칼날’ 호였다.
“제독 발렌이다! 미쳤군! 겨우 화물선 하나 잡으려고 직접 출동하다니!” 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의 칼날’ 호는 거대한 몸체를 앞세워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자유의 날개’ 호는 그에 비하면 한 점의 먼지에 불과했다.
“피할 곳은 없어. 싸워야 해.” 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조종석 뒤편의 무기 콘솔로 향했다. ‘자유의 날개’ 호에는 낡은 에너지 캐논 하나만이 장착되어 있었다.
“우리는 벨라리스의 에너지 크리스탈을 가지고 있어. 이걸 이용해서 제국에 강력한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거야!”
리나가 크리스탈을 동력원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벨라리스의 생명 에너지가 ‘자유의 날개’ 호의 낡은 회로를 타고 흐르자, 함선 전체가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젠장! 에너지가 너무 불안정해! 폭발할지도 몰라!” 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시아는 재빨리 다가와 리나의 옆에 섰다. “버텨! 우리는 할 수 있어!”
론은 필사적으로 ‘자유의 날개’ 호를 조종하며 제국 함대의 포화를 피했다. 거대한 에너지 포탄들이 그들의 함선 주위를 스쳐 지나가며 우주를 흔들었다.
“제독 발렌이 직접 나설 정도면, 이 행성 에너지 크리스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군!” 시아가 소리쳤다. “론, ‘황제의 칼날’ 호의 중앙 동력 코어 부분을 노려!”
“미쳤어? 그건… 제독 발렌의 방패 막이다!”
“해봐!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론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유의 날개’ 호를 제국 함대 사이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화물선은 제국 함선의 거대한 몸체 아래서 마치 작은 곤충처럼 날아다녔다.
“리나! 에너지 충전 100%다!”
“시아! 발사 준비 완료!”
‘황제의 칼날’ 호가 거대한 에너지 빔을 발사하려는 순간, 론은 기묘한 각도로 선회하여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금이야, 시아!” 론이 절규했다.
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발사 버튼을 눌렀다. ‘자유의 날개’ 호의 낡은 에너지 캐논에서 푸른빛의 강력한 에너지 빔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벨라리스의 모든 생명 에너지를 응축한 듯한, 찬란한 광선이었다.
콰아아아앙!
에너지 빔은 정확히 ‘황제의 칼날’ 호의 중앙 동력 코어 방어막을 꿰뚫고 들어갔다. 제국 기함의 거대한 몸체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함선 전체가 진동하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피해! 론!” 시아가 외쳤다.
론은 재빨리 함선을 돌려 폭발의 잔해에서 멀어졌다. ‘황제의 칼날’ 호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우주 미아가 된 채 암흑 속으로 떠내려갔다.
***
코볼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소행성대에 숨어, 세 사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해냈어… 우리가 해냈어…” 리나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론의 얼굴에는 기쁨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제독 발렌의 함선을 격침시켰다고? 믿을 수가 없군!”
시아는 조용히 벨라리스의 에너지 크리스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담겨 있던 행성의 생명 에너지는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시아가 나직이 말했다. “제국은 분명 더 큰 병력을 보낼 거야.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될 거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른 식민 행성들이 보낸 듯한 희미한 통신 신호들이 ‘자유의 날개’ 호의 수신기를 통해 감지되었다. 그들의 승리 소식이 이미 퍼져나가고 있었다.
“카이 아저씨도 곧 구해야 해.” 론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나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많은 행성들을 찾아가야 해. 제국의 폭정에 신음하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야 해.”
시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자유의 날개’ 호의 낡은 엔진은 다시금 희망의 빛을 발하며 어둠 속을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에 맞서는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막 날개를 펼친 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