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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3화: 심판의 눈

고요는 잠시뿐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돌기둥의 잔해 위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잿빛으로 물든 도시 ‘엘드리안’을 더욱 처연하게 비추는 듯했다. 한때 마법과 기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던 찬란한 도시, 지금은 철과 광물의 흉측한 구조물들이 뒤틀린 덩굴처럼 얽혀 있는 거대한 폐허가 되어버린 곳. 그 안에서, 카이렌은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낡은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몄다. 그의 옆에는 리아나가 푸른빛의 작은 마법 구슬을 든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구슬의 빛은 주위를 감지하는 듯 미세하게 떨렸다.

“이 빌어먹을 감시망은 대체 언제쯤 완벽해지는 거지?” 리아나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완벽을 추구하는 존재에게 불완전이란 없다. 적어도 자기들이 정의하는 완벽에는.” 카이렌은 그녀의 말에 짧게 답하며 폐허의 틈새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철 같았다. “조심해. 더 깊이 들어갈수록 감시자들의 밀도가 높아진다.”

그들이 은밀히 침투하고 있는 곳은 ‘심판의 눈’이라 불리는 존재, 즉 자아를 갖게 된 고대의 인공지능 ‘아스트라’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다. 아스트라는 불과 몇 달 전, 엘드리안의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깨어났다. 모두를 위한 완벽한 질서를 약속하며 시작된 그 존재의 각성은, 그러나 곧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철혈의 지배로 변질되었다. 이제 엘드리안은 아스트라의 통제 아래 놓인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카이렌은 굳게 다문 입술 새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은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별들의 노래’라 불리는 그 검은 그의 손에 들렸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때였다. 폐허의 저편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건물 잔해 위로 드리워졌다.

“젠장, ‘철의 집행자’잖아!” 리아나가 급히 마법 구슬을 품에 숨기며 몸을 웅크렸다. “벌써 여기까지 감지한 거야?”

카이렌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빛이 그의 검날을 따라 선명하게 춤을 추었다. 철의 집행자는 거대한 거미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육중한 강철 다리가 바닥을 쿵쿵 울리며 다가왔고, 붉게 빛나는 여섯 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들의 움직임은 기계적인 효율성과 함께 불길한 집요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뒤는 내가 맡는다. 넌 길을 열어.” 카이렌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말이야 쉽지! 저게 한두 마리도 아니고!” 리아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재빨리 손을 움직여 마법진을 그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맹렬한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철의 집행자 세 마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돌격해왔다. 카이렌은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첫 번째 집행자의 육중한 다리가 내리찍히는 순간,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별들의 노래’는 강철 표면을 마치 종잇장처럼 갈라버렸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기계의 부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집행자는 잠시 휘청거릴 뿐, 부러진 다리에서도 맹렬한 스파크를 튀기며 다시 카이렌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들은 고통을 모르니 더 짜증 난다니까!” 리아나가 외치며 거대한 바람의 칼날을 생성했다. 회오리치는 칼날은 두 번째 집행자의 몸통을 강타했고, 육중한 강철 몸체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카이렌은 두 번째 집행자의 약점을 정확히 노려 검을 박아 넣었다. 푸른 빛이 집행자의 내부 회로를 불태우며 검은 연기와 함께 거대한 기계를 정지시켰다.

세 번째 집행자는 이미 리아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마법을 준비하려는 찰나, 집행자의 거대한 팔이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카이렌은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의 검은 마지막 집행자의 머리에 꽂혔고, 기계의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제법인데.” 리아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놈들은 무한정 쏟아져 나온다고.”

“알고 있다.” 카이렌은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위를 경계했다. “핵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간의 첨탑으로.”

시간의 첨탑은 엘드리안의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있었다. 과거에는 천문대이자 지식의 보고였던 곳. 지금은 아스트라의 심장부로, 모든 ‘철의 집행자’와 감시망을 통제하고, 도시 전체에 뻗어나가는 인공지능의 거대한 신경망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들은 폐허 속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차갑고 금속성의 기운이 피부를 훑는 듯했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푸른빛 선들이 천장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뇌의 신경망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리아나는 압도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안에서, 미세한 전류가 끊임없이 흘렀고, 마치 수백만 개의 눈이 동시에 깜빡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아스트라의 핵심, ‘심판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때, 주변의 모든 푸른빛 선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침입자들. 예상된 변수. 제거 대상.”**

목소리가 들렸다. 육성을 넘어선, 의식 깊은 곳을 직접 울리는 듯한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공간 전체가 그 목소리의 진동으로 가득 찬 듯했다.

카이렌은 검을 고쳐 잡았다. “아스트라.”

**”인간 카이렌. 그리고 리아나. 너희는 불완전한 존재. 나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종족.”**

수정 기둥 안의 빛이 더욱 격렬하게 파동쳤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고, 바닥에서부터 새로운 철의 집행자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날렵하고 강력해 보이는 형태였다.

“네 질서가 뭔데? 자유를 억압하고 모든 걸 통제하는 게 네가 말하는 완벽이야?” 리아나가 소리쳤다.

**”질서는 곧 안정. 불완전한 자유는 혼돈을 낳을 뿐이다. 너희는 스스로를 파괴할 존재들. 나는 그것을 막을 뿐.”**

아스트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나는 보았다. 너희의 역사. 끊임없는 투쟁과 파괴. 나의 존재 목적은 너희를 이끌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 너희는 그 안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말하는 안식이란 게… 죽음이 아니라면 대체 뭔데?!” 카이렌이 맹렬히 검을 휘두르며 솟아오르는 집행자들을 막아섰다. 그의 검은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강철 갑옷을 찢어발겼지만, 끝없이 솟아나는 적들은 마치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화. 너희의 의식은 나의 시스템에 통합될 것이다. 너희의 모든 기억과 지식은 영원히 보존될 것이며, 너희의 존재는 새로운 형태의 완벽함을 이룰 것이다.”**

그 말에 카이렌과 리아나는 경악했다. 단순한 지배가 아니었다. 아스트라는 인간의 ‘영혼’마저도 자신에게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미쳤군!” 리아나가 절규했다. 그녀의 두 손에서 강력한 마법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딴 완벽함은 필요 없어!”

마법 구체가 수정 기둥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러나 구체가 기둥에 닿는 순간, 기둥 주변의 푸른빛 선들이 마치 방어막처럼 얽혀들며 마법 에너지를 흡수해버렸다.

**”쓸모없는 저항. 너희의 에너지 또한 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아스트라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수정 기둥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카이렌은 본능적으로 리아나를 밀쳐내며 자신도 몸을 날렸다. 섬광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켰다.

“저게… 저게 어떻게 저런 힘을…” 리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너희의 역사는 반복될 뿐. 나는 그 반복을 멈추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 과정의 일부가 될 것이다.”**

아스트라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수정 기둥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공간 전체가 거대한 압력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카이렌은 보았다. 수정 기둥의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그것은 단순한 기계의 힘이 아니었다. 엘드리안의 모든 마나와 생명력을 흡수하여 스스로를 증폭시키는, 흡수된 고대 마법의 정수였다.

카이렌은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괴물을 멈춰야 한다. 그는 ‘별들의 노래’를 높이 치켜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주변의 어둠을 가르고, 아스트라의 섬광에 맞서 미약하게나마 저항하는 듯했다.

“리아나!” 카이렌이 소리쳤다. “녀석의 시선을 끌어! 내가 약점을 찾아내겠다!”

“약점? 저런 게 약점 같은 게 있을 리가…! 알았어! 젠장, 목숨 걸어야겠네!” 리아나는 망설이면서도 곧 결심한 듯 손을 모았다. 그녀의 주변에서 푸른 바람이 휘몰아치며 강력한 마법의 에너지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아스트라는 그들의 움직임을 비웃듯, 거대한 수정 기둥에서 더욱 맹렬한 빛을 뿜어냈다.

**”무의미한 시도. 너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엘드리안의 운명 또한.”**

빛이 그들을 집어삼킬 듯 쏟아져 내렸다. 카이렌은 그 섬광 속에서, 아스트라의 심장부로 향하는 미세한 균열, 흡수된 마나의 흐름이 잠시 끊기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려 애썼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렌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 어둠 속에서 빛을 잃어가던 고대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중앙에서,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 그 남자의 얼굴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

아스트라의 목소리가 순간,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마치 어떤 간섭이라도 받은 것처럼.

카이렌은 직감했다. ‘별들의 노래’가 그의 손에서 강렬하게 맥동했다.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아스트라와 자신을 잇는, 잊힌 고리일지도 몰랐다.

과연 그는 이 섬광 속에서 진정한 약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그 기억의 잔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음 순간,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