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서막
어둠이 지배하는 이 거리는 언제나 그랬듯 비릿한 기계 기름 냄새와 인간의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낡은 네온사인만이 간간이 빛을 뿌리는 골목 깊숙한 곳, 강태한은 망토처럼 넓은 후드티를 눌러쓴 채 허름한 철제 난간에 기댔다. 그의 시선은 잿빛 빌딩 숲 저 너머, 높다랗게 솟아오른 ‘넥서스 코퍼레이션’의 본사 타워를 향했다. 그 첨탑은 마치 거대한 문명의 상징처럼 밤하늘을 꿰뚫고 있었다. 그곳에 이선우가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가. 그리고 오늘 밤, 복수의 첫 번째 조각이 맞춰질 참이었다.
3년 전, 그 역시 저 타워의 상층부에서 미래를 논했었다. 선우와 함께, 세상을 바꿀 거대한 꿈을 꿨었다. 그의 이름을 딴 ‘크로노스 프로젝트’는 인류의 지성 한계를 돌파할 혁신적인 시도였고, 선우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우린 세상을 바꿀 거야, 태한아. 믿지?”
선우의 미소는 언제나 따뜻하고 진심 같았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독이 숨겨져 있었다.
태한은 눈을 감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동료들의 시선, 폐기물처럼 버려졌던 기억. 기밀 유출이라는 누명 아래, 크로노스 프로젝트의 모든 공은 선우에게로 넘어갔고,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지옥 같은 3년이었다. 시스템에서 삭제된 존재처럼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살과 뼈에 새겨져 있었다. 매일 밤 악몽처럼 그를 조롱했다.
“더 이상은 없어.”
낮게 읊조린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끝에서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왼팔에 내장된 ‘셰이드 프로세서’가 징- 하고 낮게 울었다. 과거 사고로 잃은 왼팔을 대신하는 이 의수는 평범한 의수가 아니었다. 특수 합금으로 이루어진 섬세한 기계 손가락이 길게 뻗은 데이터 케이블을 낡은 전파 수신기에 연결했다. 그의 망막에 투사된 홀로그램 스크린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타겟 시스템 – 넥서스 중앙 전파 중계탑 보조 서버. 접근 코드 확인 중…`
녹색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그의 타겟은 넥서스 코퍼레이션의 외곽 서버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3년 전, 그가 선우의 음모로 누명을 썼던 ‘크로노스 프로젝트 기밀 유출’ 사건의 원본 데이터가 암호화된 채 잠들어 있었다. 선우는 그 원본 데이터를 교묘하게 변조하여 태한이 외부 세력에게 기밀을 유출한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그 원본 데이터를 빼돌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태한이 만들었던 크로노스 프로젝트를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표했다.
과거 그와 선우가 함께 만들었던 보안 프로토콜을 우회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선우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프로토콜의 설계자는 바로 강태한 자신이었으니까.
`경고: 외부 스캔 탐지.`
삐빅- 삐빅- 불규칙적인 경고음이 귓가에 울렸다.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던 넥서스 시큐리티 드론이 그의 위치로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드론의 스캐닝 빔이 그의 등 뒤를 스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는 듯한 섬뜩함.
“젠장, 벌써?”
태한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드론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가 숨어있는 난간 바로 위까지 접근했다. 붉은색 스캔 빔이 그를 훑으려 하는 찰나, 그는 즉시 셰이드 프로세서에 내장된 해킹 명령어를 삽입했다.
`프로토콜 – 고스트 미러. 실행.`
드론의 시야에 주변의 잔상을 투사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일시적인 은폐 기술. 주변의 낡은 건물 잔해와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드론의 센서에 교란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드론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듯 다시 고도를 높여 사라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완벽하게 작동했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넥서스의 방어 시스템은 그 어떤 것보다 치밀하고 빨랐다.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데이터 스트림 확보. 암호화 해제 중… 30%… 60%… 90%… 완료.`
성공. 그의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크로노스 프로젝트 기밀 자료 – 원본’이라는 제목의 파일 목록이 떴다. 이선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훔쳐가기 위해 조작했던 바로 그 파일이었다. 변조된 파일과 원본 파일의 해시값은 단 한 글자 달랐다. 그 단 한 글자가 바로 진실이었다. 태한은 망설임 없이 ‘다운로드’ 명령을 입력했다.
`파일 전송 시작… 완료.`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태한은 마지막 코드를 입력했다. 선우만이 알 수 있는, 그들의 첫 만남에서 공유했던 시구의 한 구절. 시스템 메시지에 짧게 깜빡였다.
`어둠 속에 핀 가시, 그대에게 닿으리.`
복수의 서막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선우는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자신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불안에 떨게 될 것이다.
태한은 차갑게 식은 바람을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하늘처럼 깊었으나, 그 안에서는 지독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선우.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하나하나 무너뜨려 줄게.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늘 밤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복수는 이제 막 날개를 펼쳤을 뿐이었다.
저 멀리 넥서스 코퍼레이션의 타워는 여전히 밤하늘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태한의 눈에는 더 이상 영광의 상징이 아니었다. 곧 저 빛은 검은 그림자에 잠식될 것이다. 그의 그림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