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의 심연 – 12화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싸늘한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이한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중 하나처럼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고, 날카로운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흉측하게 변형된 종유석들이 천장에서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 알 수 없는 형체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곳은 그가 숨 쉬는 지옥이자,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이었다.
“강태오.”
메마른 입술 새로 굳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 믿었던 친구의 환한 미소 아래 감춰진 칼날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심연의 미궁, 그 비명조차 닿지 않던 가장 깊은 곳에서 태오는 망설임 없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벼랑 끝으로 떠밀린 채, 무수한 그림자 짐승들에게 둘러싸였던 그때의 절망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아 겨우 기어 나왔을 때, 이한의 세계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명예도, 신뢰도, 그리고 그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파편 위에서 그는 오직 하나의 그림자를 쫓았다. 복수의 그림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증오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그는 미궁의 어둠 속을 유영하듯 나아갔다. 그의 심장 속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지난 3년간 그를 지탱해온 유일한 원동력이자, 곧 강태오를 불태워버릴 지옥의 불꽃이었다.
갑작스레 그림자가 춤을 추듯 일렁였다.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거대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돌연변이 ‘심연의 추적자’였다. 날카로운 발톱과 짐승의 송곳니를 가진 놈들은 일반적인 던전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세 마리의 추적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삼면에서 이한을 향해 동시에 공격해왔다. 놈들의 입에서는 푸르스름한 독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한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검은 연기 같은 기운이 피어 오르더니, 이내 날카로운 그림자 비수로 응축되었다. 그림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비수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의 손 안에서 맥동했다.
쉬이익!
첫 번째 추적자의 목덜미를 가른 것은 한 줄기 검은 섬광이었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 피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흡수되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다.
뒤이어 달려드는 놈들에게 이한은 몸을 맡겼다. 그림자와 동화된 듯한 움직임. 검은 기운이 그의 사지를 감싸며 속도를 더했다. 두 번째 추적자의 어깨를 밟고 튀어 오르자, 주변의 그림자들이 마치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거대한 그림자 촉수들이 놈의 사지를 얽어매고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크아악! 끔찍한 비명이 미궁에 울려 퍼졌다. 그림자에게 붙잡힌 놈은 순식간에 시든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지며 생명을 빼앗겼다. 남은 한 마리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늦었다. 이한의 그림자 비수가 놈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시시하군.”
차가운 혼잣말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예전이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들이었지만, 지금의 이한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결에 불과했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힘. 그림자를 지배하고,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능력. 그것은 복수를 위한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태오가 주저앉힌 그의 삶을 다시 세울 유일한 동력이었다.
쓰러진 추적자들의 잔해를 지나치던 이한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멈췄다. 몬스터들의 피로 엉망이 된 바닥 한구석, 섬광처럼 빛나는 작은 물체가 박혀 있었다. 손을 뻗어 집어 들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그것은 강태오가 이끄는 길드, ‘천룡(天龍)’의 문양이 새겨진 인식표였다.
이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이곳까지 왔나. 제법 빠르군, 태오.’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지독한 증오가 그의 심장을 다시 한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이 심연의 미궁에서 태오가 노리는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물이 태오의 손에 닿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자신을 던져버린 대가가 무엇인지, 강태오에게 똑똑히 보여줄 차례였다.
인식표를 움켜쥔 채, 이한은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림자들이 그의 발아래서 길을 열어주듯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귀에 낯선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이 미궁은 끝이 없어! 벌써 이틀째 헤매는 중이라고!”
“닥쳐! 보물만 찾으면 모든 게 끝난다. 태오님은 이 미궁의 심연에 엄청난 것이 잠들어 있다고 확신하고 계셔. 그분을 믿어야지!”
이한은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불빛 너머로 세 명의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천룡’ 길드의 정예 대원들이었다.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그들의 대화는 이한의 심장을 더욱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태오가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증거였다.
“근데, 아까부터 뭔가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꼭…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은데.”
대원 중 한 명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한은 완벽하게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 있었다. 기척 하나 흘리지 않는 그의 존재를 감지할 수는 없으리라. 그는 그림자이자, 동시에 그림자 그 자체였다.
‘그래, 느껴봐라. 내가 이곳에 있음을.’
이한은 침묵 속에서 비웃었다. 그림자 속에서 그의 눈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그림자 비수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자, 새로운 복수의 밤이 시작되는 순간.
대원들이 잠시 멈춰 서서 서로에게 의지하듯 몸을 가까이 붙였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육중한 철문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문틈 새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은 이 미궁의 진정한 심장부가 저 너머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한의 시선은 철문이 아닌, 그 너머에 있을 강태오를 향해 있었다.
“태오…”
그의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모든 것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아니, 되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정적을 깨고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금속음이 미궁 전체를 울렸다. 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이 어둠 속의 세 대원들을 비추는 동시에, 그들의 뒤편에 드리워진 이한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이한은 그림자 속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다음 순간, 대원들 중 가장 뒤에 있던 한 명의 목 뒤에 섬뜩한 냉기가 스쳤다.
“누, 누구냐?!”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대원의 눈이 공포에 질려 크게 뜨이는 순간, 그의 목에서 붉은 선이 그어졌다. 곧이어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머지 두 명의 대원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한의 그림자 비수는 이미 두 번째 대원의 심장을 향해 뻗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