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아파트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지혜는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손 안의 따뜻한 머그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사 업무의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 고요한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나른한 똑딱거림으로 존재를 알렸다. 똑, 딱. 똑, 딱.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아주 미세한,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스스슥…
지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벌레인가?’ 싶었지만, 워낙 예민한 청각을 가진 터라 쥐새끼라도 들어왔을까 불쾌함이 앞섰다.
“뭐야?”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거실의 아늑한 조명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어둠이 주방 입구에 드리워져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 쥐죽은 듯 조용해졌을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듣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아까의 그 긁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보던 드라마 채널을 코미디로 돌렸다.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채우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칫솔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세면대 구석에 놓아두었던 립밤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딨지?”
분명 어젯밤 양치를 하고 나서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었기에, 립밤이 사라진 것은 꽤나 의아했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퇴근 후, 지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섬뜩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질러진 신발장.
그녀의 구두 한 짝이 신발장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신발을 신으려다 던져 놓은 것처럼. 지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이렇게 놓고 나갔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신발 정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라 저런 식으로 내버려 뒀을 리 없었다.
“바람인가…”
창문이 열려 있었나 싶어 거실로 향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설마 도둑?
긴장한 채 발소리를 죽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마시고 두었던 유리컵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세상에…”
지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아파트에서 3년째 살면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컵이 저절로 떨어져 깨질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그녀는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친구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수민아. 나 지금 진짜 너무 이상해.”
수민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이 시간에. 또 야근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집에 왔는데 컵이 깨져 있고, 신발장도 엉망진창이야. 어제 내가 나갈 때 분명히 제대로 해놨단 말이야.”
수민은 하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요새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헛것 보는 거 아니냐? 피곤하면 다 그렇게 보여.”
“아니야! 진짜라니까. 어제는 립밤도 없어지고, 이상한 소리도 났었어. 진짜 누가 들어왔던 거 아닐까?”
수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둑이 립밤이나 훔쳐가겠냐? 그리고 아파트에 누가 그렇게 쉽게 들어와. 그냥 네가 정신없이 살다 보니 착각하는 거겠지. 불면증 초기 증상 아니냐? 어서 자.”
수민은 그녀의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지혜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외로운 불안감이 엄습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의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지혜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고 샤워를 마쳤다. 몸을 씻고 나니 조금은 나아질까 했지만,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져서 주변의 작은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휴대폰으로 불길한 기사를 검색해보려다가 멈췄다. 괜히 더 무서워질 것 같았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가 벽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혜는 조명 아래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읽다가 잠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페이지 읽었을까,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스스슥…
이번에는 옷장 안에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
지혜는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아니야, 아니야. 분명 환청일 거야.’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손에 쥔 책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 옷장 문이 스르륵 열렸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천천히, 안쪽에 걸린 옷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지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눈만 크게 뜨고 옷장을 노려봤다.
옷장 안쪽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했다.
검고 흐릿한 형체. 마치 키 작은 아이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혜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누, 누구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옷장 속 어둠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히히… 히히히히…
섬뜩하게 갈라지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작고 창백한 손 하나가 스르륵 튀어나왔다.
손가락 끝은 마치 불에 그을린 듯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손톱은 길고 날카로웠다.
그 손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옷걸이에 걸려 있던 지혜의 원피스를 움켜쥐었다.
지혜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옷장 속의 존재는 원피스를 움켜쥔 채, 마치 잡아당기듯 옷을 끌어당겼다.
툭.
옷걸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옷장 속 어둠이 다시 깊어지더니, 열려있던 옷장 문이 ‘쿵’ 하고 세게 닫혔다.
지혜는 그제야 억눌렸던 숨을 토해내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더 이상 이 집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혜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온몸의 세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어디 가…?”
귓가에 속삭이는, 어린아이의 싸늘한 목소리.
지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그리고 현관문 바로 옆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액자 속 그녀의 가족사진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차가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지혜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그녀의 아파트에, 무언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