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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림자 속의 숨결**
“젠장, 여기도 거의 다 털렸잖아.”
강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붕괴된 서점의 잔해 속을 헤집었다. 발밑에서는 깨진 유리와 썩은 나무 조각들이 ‘바삭’ 소리를 내며 부스러졌다. 희미한 햇빛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스며들어 먼지 가득한 공기 속을 춤추는 무수한 입자들을 비췄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섞인 공기는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오빠, 저긴 어때? 책장 뒤쪽.” 유나가 작은 손전등을 들어 깊은 어둠 속을 비췄다. 불빛이 닿은 곳에는 뒤틀린 철골과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울어진 책장들이 보였다. 몇몇 책들은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기는 무너진 부분이랑 너무 가까워. 괜히 건드렸다가 매몰되면 끝장이야. 식량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하다못해 쓸만한 도구라도 찾아야 하는데… 이대로 가면 내일 아침도 장담 못 해.”
어깨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가 턱없이 가벼웠다. 며칠 전 겨우 찾아낸 딱딱한 건빵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세계에 떨어져 눈을 뜬 순간부터, 그의 삶은 매일이 이런 식이었다. 한국에서 평범한 회사원이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생존 투쟁의 연속.
그가 살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멸망에 가까운 대재앙 이후, 이 땅은 폐허가 되었고, 알 수 없는 변이 생물들과 극한의 환경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현은 가끔 이 모든 것이 지독한 꿈이기를 바랐지만, 유나의 불안한 눈빛과 마른 기침 소리는 매 순간이 현실임을 잔인하게 일깨웠다.
“어? 오빠, 이거 봐!”
유나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너진 책장 틈새, 흙먼지에 반쯤 묻힌 공간을 손전등으로 비추고 있었다. 강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낡은 나무판자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는 녹슨 철제 상자가 보였다. 손으로 덮인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자 ‘비상구’라는 희미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 강현은 심장이 조용히 뛰는 것을 느꼈다. 굳게 닫힌 상자의 자물쇠는 이미 녹슬어 부서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습기를 막기 위해 비닐에 꼼꼼히 싸여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휴대용 물 필터였다. 다행히 밀봉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상용 에너지바 몇 개와 작은 의료 키트가 들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녹이 슬긴 했지만 여전히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사냥용 칼 한 자루.
“대박! 오빠, 이거면 물 걱정은 좀 덜 수 있겠어!” 유나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강현도 내심 안도했다. 물 필터는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이세계의 물은 오염되어 마실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 키트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소독약, 붕대, 진통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요긴하게 쓰일 만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이 정도 가지고 안심하기엔 이 세상은 너무 위험해.” 강현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필터와 에너지바를 배낭에 조심스럽게 넣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스슥…’
아주 미세한 소리. 마치 낡은 옷감이 바닥에 스치는 듯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강현의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지난 수개월간 단련된 그의 생존 본능이 비상 신호를 울렸다.
“쉿.”
강현은 유나의 입을 손으로 막고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나의 눈동자가 겁에 질려 크게 흔들렸다. 그녀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스스슥… 스스슥…’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 붕괴된 책장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강현은 허리춤에 찬 녹슨 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새로 얻은 사냥용 칼을 꺼내기에는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숨소리조차 크게 느껴졌다.
그림자. 움직이는 것은 그림자 그 자체 같았다. 윤곽도 없이, 형태도 불분명하게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존재. 이 세계에 재앙이 닥친 후 나타난 변이 생명체들 중 가장 악명이 높은 ‘그림자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했으며, 압도적인 속도로 사냥감을 덮쳤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은 폐허 깊은 곳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서점은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한 폐허였던가.
강현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흐릿하게나마 그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고, 온몸이 검은색 털로 뒤덮인 짐승. 흡사 거대한 거미와 인간이 섞인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놈의 몸통에서는 섬뜩한 ‘스스슥’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놈은 유나의 손전등 불빛을 피하려는 듯, 책장 더미와 벽의 그림자를 이용해 숨어들어 움직였다. 유나는 온몸을 떨며 강현의 뒤로 바싹 붙었다.
“움직이지 마. 숨도 쉬지 마.” 강현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그의 눈은 그림자 사냥꾼의 움직임을 쫓았다. 놈은 그들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먹잇감을 포위하려는 듯 둥글게 돌아가며 접근하고 있었다.
놈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강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놈이 몸을 낮췄다. 공격 직전의 자세였다.
강현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폐허 깊숙이 들어온 이상, 물러설 길도 마땅치 않았다. 싸워야 했다.
그는 유나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오빠가 싸우는 동안, 저기 보이는 깨진 창문으로 도망쳐! 곧장 뛰어가서 뒤돌아보지 마!”
유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오빠를 혼자 두고 안 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건 명령이야! 무조건 살아야 해!” 강현은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그의 말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림자 사냥꾼이 ‘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웅크렸다. 곧 튀어 오를 참이었다.
“지금이야!” 강현은 유나의 손을 놓는 동시에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그림자 사냥꾼의 약점인 붉은 눈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강현의 기합 소리와 함께 철 파이프가 맹렬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림자 사냥꾼은 예상치 못한 그의 움직임에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앞발을 휘둘러 강현을 쳐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강현의 몸이 책장 더미에 부딪혔다.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덮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강현은 쓰러진 채로 철 파이프를 휘둘렀다. 놈의 다리를 노린 일격이었다. ‘쩌억!’ 파이프가 놈의 얇고 단단한 다리에 부딪혔다. 놈은 고통스러운 듯 ‘끼이이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놈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강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오직 놈의 붉은 눈만을 겨냥했다. 이 세계에 떨어져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배운 유일한 교훈은, 한순간의 망설임이 곧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유나! 뭐 해! 빨리 도망쳐!” 강현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유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오빠의 절박한 외침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겨우 몸을 돌렸다. ‘탁탁탁’ 하는 작은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강현은 유나가 도망치는 소리를 들으며 더욱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림자 사냥꾼은 분노한 듯 날카로운 발톱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강현은 겨우겨우 몸을 피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버텨야 해. 살아남아야 해.’
놈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마치 그림자가 공간을 이동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강현은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뚝을 스쳤다. ‘찍!’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강현은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분노가 그의 생존 본능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는 찢어진 팔뚝을 붙잡은 채, 철 파이프를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이 빌어먹을 짐승!”
놈이 다시 공격해 오자, 강현은 모든 힘을 실어 철 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머리였다. 놈이 속도에만 치중한 채 그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순간, 강현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 파이프가 놈의 붉은 눈을 강타했다. ‘끼이이이익!!!’ 그림자 사냥꾼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붉은 피가 검은 털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놈의 한쪽 눈이 터져 사라졌다.
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 강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파이프를 들어 나머지 눈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놈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흐읍, 흐읍…’
강현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팔뚝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겨우 해치운 그림자 사냥꾼은 미동도 없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유나를 찾아야 했다. 그는 피투성이 팔뚝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유나가 도망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된 거리로 나왔을 때, 유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강현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오빠! 오빠 괜찮아? 피… 피가 너무 많이 나!” 유나는 그의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새하얗게 질렸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강현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의료 키트를 꺼냈다. 유나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을 덮었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 모든 고통을 덮었다.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실루엣은 더욱 음산하게 보였다. 강현은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내일은…?’
새로 얻은 물 필터와 에너지바, 그리고 상처투성이 몸. 그들의 생존은 한시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강현은 유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자, 유나. 여기서 더 늦기 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은 또 어떤 고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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