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세상은 붉었다. 해가 떠올라도, 달이 지고 별이 춤을 추어도, 핏빛으로 물든 절망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것들’이 몰고 온 종말 이후, 인류는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숨죽이며 살았다. 생존자들은 강철과 콘크리트로 요새화된 작은 공동체에 갇혀, 밖의 모든 것을 ‘망자’라 불렀다.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서도 질서는 허물어지고 광기가 싹트기 쉬웠지만, 적어도 직접적인 살인은 흔치 않았다. 모두가 망자와의 싸움에 힘을 합쳐야 할 때였으니까.

강태한. 30대 후반의 마른 체격,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 한때는 수도 서울의 명성을 떨치던 형사였으나, 이제는 그저 생존자 공동체의 ‘문제 해결사’에 불과했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썩어가는 세상에서도 녹슬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듯했다. 그는 지금, 방벽 안쪽의 작은 감시탑에서 망자들이 지배하는 잿빛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가 그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강태한 씨! 큰일 났습니다! 지하 연구 기지 7호에서… 박한 박사님이 살해당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곳 공동체의 리더 중 한 명인 최영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난 온 첫날처럼 창백했다. 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살해? 망자의 소행이 아니라?”

“네. 밀실입니다. 완벽한 밀실 살인이에요.”

태한의 눈에 미묘한 흥미의 빛이 스쳤다. 망자들이 바글거리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밀실 살인’이라는 정교한 장난을 벌였다는 사실이 기묘한 비장미를 더했다.

지하 연구 기지 7호는 콘크리트와 강철로 이중 삼중 요새화된 거대한 벙커였다. 이곳의 과학자들은 망자들의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찾고 있었다. 밖에서는 망자들의 낮은 신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안은 공기 정화 장치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살인의 현장은 이곳의 심장부, 박한 박사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강철로 된 육중한 문은 보안 팀장 김현수와 함께하는 최태한에게 마치 인류가 쌓아 올린 마지막 방벽처럼 느껴졌다. 김현수는 근육질의 과묵한 남자였다. 땀으로 젖은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생체 인식과 암호 시스템으로 이중 잠금 되어 있었고, 출입 기록에는 박사님 외에 아무도 드나든 흔적이 없어요. CCTV도 마찬가지고요.”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동시에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연구실 내부는 깔끔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실험대와 복잡한 장비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방탄 처리된 투명한 창문이 외부와 격리된 실험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박한 박사가 그의 연구 책상에 머리를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팍에는 예리한 흉기로 찔린 듯한 흔적이 선명했다. 시반이 굳어가는 것으로 보아, 살해된 지 꽤 시간이 흐른 듯했다.

태한은 방 안을 꼼꼼히 훑었다. 유리창, 환기구, 바닥, 천장… 모든 곳이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범인이 들어왔다가 나갔을 법한 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흉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누가 박사님의 연구에 접근할 수 있었죠?” 태한이 물었다.

김현수가 곧바로 답했다. “박사님의 수석 연구원인 최지혜 박사, 그리고 시설 관리팀장인 이정우 팀장입니다. 물론 보안 팀원들도 비상시에는 접근 권한을 가집니다만, 저희는 어제 오후부터 계속 경계 근무 중이었습니다.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해요.”

태한은 박한 박사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마우스가 쥐어져 있었고,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암호화된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죽음이 그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는 듯, 고통스러운 몸부림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때, 태한의 시선이 책상 모서리에 닿았다. 아주 미세한 흠집, 금속성 무언가에 긁힌 듯한.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패널. 그것은 보통 바이러스 샘플이나 소량의 물질을 이동시킬 때 사용하는 ‘샘플 이동 포트’였다. 지름 10c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구멍이었다.

“이 포트의 기록은요?” 태한이 물었다.

“아, 그건 단순한 물질 이동 통로라 별도의 기록은 없습니다. 연구실 내부에서 외부의 무균실로 샘플을 보낼 때만 사용하죠. 사람의 출입은 불가능합니다.” 김현수가 대답했다.

태한은 그 포트 주변의 바닥과 벽을 자세히 살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분진이 먼지처럼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냄새. 박사님의 연구실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금속성 액체의 특이한 냄새였다.

첫 번째 용의자는 최지혜 박사였다. 서늘하고 지적인 인상을 가진 그녀는 박한 박사의 연구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사님과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태한이 물었다.

최지혜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스승이자 동료였습니다. 물론 의견 충돌은 있었죠. 특히 박사님의 새로운 바이러스 변이체 연구에 대해서는… 저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위험했으니까요.”

“위험했다고요?”

“네. 박사님은 새로운 백신 개발을 위해 기존 바이러스와 다른 돌연변이 바이러스를 연구 중이셨습니다. 성공하면 인류의 구원이지만, 실패하면… 파멸이었죠. 하지만 박사님은 너무 조급하셨습니다.”

그녀는 박한 박사의 연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어떤 자료를 다루고 있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의 말투는 냉철했지만, 태한은 그녀의 눈빛 속에서 미묘한 불안감을 읽었다.

다음은 시설 관리팀장 이정우. 작업복 차림의 그는 지하 연구 기지 7호의 모든 배관과 전선, 구조를 꿰뚫고 있는 남자였다.

“박사님 연구실의 샘플 이동 포트 말입니다. 그 구조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태한이 물었다.

이정우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아, 네. 그건 박사님 요청으로 특별히 설계된 겁니다. 외부 무균실과 직접 연결되어 샘플을 주고받는 구조죠. 내부에서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샘플을 놓으면, 외부에서 역시 버튼을 눌러 회수하는 방식입니다. 양쪽 문이 동시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포트를 통해 물건을 넣고 빼는 데 필요한 도구 같은 게 있습니까?”

“글쎄요… 딱히. 손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니까요. 하지만 아주 정교한 작업을 하려면 핀셋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겠죠.”

그의 알리바이는 그날 저녁 시설 점검에 있었고, 여러 팀원들이 그의 동선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태한은 그의 설명 속에서 어떤 비정상적인 ‘공백’을 감지했다.

다시 박한 박사의 연구실. 태한은 샘플 이동 포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미세한 금속성 흠집. 그리고 그 주변의 분진. 평범한 먼지 같지만, 어딘가 다른 특유의 반짝임이 있었다.

태한은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환기구는 완벽하게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샘플 이동 포트의 ‘외부 무균실’과 연결된 통로에 꽂혔다. 그 통로는 연구실 벽 안쪽, 외부 무균실의 벽 안쪽을 지나서 연결된다.

“김 팀장님, 샘플 이동 포트의 외부 무균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태한이 물었다.

김현수는 즉시 지도를 펼쳐 보였다. “여기입니다. 박사님 연구실 바로 옆방이죠. 이곳은 특정 연구원들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최지혜 박사도 그중 한 명이죠.”

태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그 무균실은 항상 무균 상태를 유지해야 할 텐데, 청소나 소독은 어떻게 하죠?”

“자동화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물론 필요시 인력으로도 소독합니다. 그때는 강력한 소독제를 사용하죠. 주로… 특정 금속성 액체를 포함한 소독제가 쓰입니다.” 김현수가 설명했다.

금속성 액체. 태한이 맡았던 희미한 냄새의 정체였다. 그리고 포트 주변의 미세한 분진. 그건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그 소독제에 포함된 금속 성분이었다. 범인은 외부 무균실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태한은 샘플 이동 포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구멍. 그 안쪽 벽면에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른 포트에는 없는, 인위적으로 뚫린 구멍이었다.

그때,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세 명의 용의자들이 다시 태한 앞에 앉았다. 엄숙하고 긴장된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밀실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범인은 박사님의 연구실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태한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세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 “왜냐하면, 범인은 박사님을 직접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세 사람의 얼굴에 혼란이 스쳤다.

“이정우 팀장님. 박사님 연구실의 샘플 이동 포트는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하셨죠. 그리고 그 주변에서… 독특한 금속성 분진과 냄새가 났습니다. 외부 무균실 소독제에 포함된 성분이었죠.”

이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제가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 샘플 이동 포트의 내부에 인위적으로 뚫린 아주 작은 구멍이 있었습니다. 다른 포트에는 없는 구멍이었죠.” 태한은 멈추지 않았다. “범인은 이 구멍을 이용했습니다.”

최지혜가 불안한 듯 숨을 들이켰다. 김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은 박사님 연구실 바로 옆의 외부 무균실에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박사님이 샘플 이동 포트 근처에서 작업을 하실 때를 노린 겁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특별히 제작된’ 장치를 밀어 넣었죠.”

태한은 이정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정우 팀장님. 그 구멍은 일반적인 도구로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오직 시설의 구조를 완벽히 꿰뚫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정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박사님 연구실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새로운 바이러스 변이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도요. 혹시, 그 연구 결과를 가로채려 했습니까? 아니면… 박사님을 방해하려 했습니까?”

이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장치는 무엇이었습니까? 샘플 이동 포트의 작은 구멍을 통과해 정확히 박사님의 심장을 꿰뚫고, 다시 흔적도 없이 회수될 수 있는 장치.” 태한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위압감은 여전했다. “시설 관리팀장으로서, 연구실의 모든 도구와 장비를 파악하고 있었을 겁니다. 혹시… 길고 가느다란 의료용 강철 집게 같은 것을 개조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그 끝에 날카로운 칼날을 달아서.”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정우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망했습니다… 박사님은… 그 위험한 변이체를 외부로 반출하려 했습니다! 인류에게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아야 했습니다… 그 자료는… 제게도 필요했어요… 저도 백신을 연구 중이었습니다… 박사님보다 먼저…!”

그의 광기 어린 고백은 망자들이 가득한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탐욕과 질투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태한은 이정우의 고백을 덤덤히 들었다. 김현수는 이정우를 일으켜 세워 연행했다. 밀실은 더 이상 밀실이 아니었다. 살인의 트릭은 밝혀졌고, 범인은 잡혔다.

그러나 태한의 얼굴에는 만족감 대신 짙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망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남은 자들의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인류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부의 균열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까?

태한은 잿빛 세상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망자들의 신음 소리가 여전히 귀를 때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