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었다. 소리 없이 세상에 내려앉는 작고 하얀 조각들은, 지난밤 내내 꿈결처럼 휘몰아치던 설렘을 현실로 불러오는 듯했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꽃을 바라보며 수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닿는 손끝에, 얼음 같은 감각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이 스쳤다.
수연은 자신이 일하는 ‘별다방’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공원 쪽으로 향해 있었다. 십 년 전, 그 날의 눈도 이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게 내렸다. 뺨에 닿는 눈의 차가움,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나눈 약속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수연아,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겨울에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꼭 다시 만나자. 이 나무 아래서. 그때까지, 우리 헤어지지 말고 꼭 다시 만나야 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새겨진 작고 투명한 나무 눈꽃 조각을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수연은 지금도 그 조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작고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눈꽃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게 닳아버린 나뭇결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오후 두 시, 카페 문이 열리고 맑은 풍경종 소리가 울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들어온 한 남자가 실내의 따뜻한 온기에 스며들었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익숙한 듯 창가 쪽 테이블로 향했다. 그가 앉은 자리는 수연이 어릴 적 지훈과 함께 앉아 꿈을 이야기하던 그 자리였다.
“따뜻한 핫초코에 시나몬 가루 조금만 뿌려주세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수연은 주문을 받으러 다가서다 순간 멈칫했다. 핫초코에 시나몬. 잊고 지낸지 오래된, 너무도 익숙했던 주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의 콧등 위, 눈썹 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반달 모양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라고, 지훈이 투덜거리던 그 흉터가.
수연의 심장이 갑자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는 아주 오래전에 이 도시를 떠났고,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분명 다른 사람이겠지.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핫초코를 만들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잔에 시나몬 가루를 솔솔 뿌리자,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퍼졌다. 마치 과거의 한 장면처럼.
남자는 핫초코를 받아들고 말없이 창밖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아련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수연은 서둘러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며,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자꾸만 그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서 리듬을 타듯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졌다. 아주 어릴 적, 지훈이 초조하거나 깊은 생각에 잠길 때마다 나타나던 습관이었다.
어느새 카페는 한산해졌고, 남자는 핫초코를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멈춰 서서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눈 속으로 사라졌다. 짤랑, 풍경종 소리가 허무하게 울렸다.
수연은 멍하니 그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테이블 위, 작은 가죽 다이어리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오래된 가죽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쩌면, 아니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이것이 그가 남긴 흔적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순된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펼쳤다.
첫 장에는 희미하게 눌린 단풍잎 하나가 박제되어 있었다. 바싹 마른 잎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익숙한 풍경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가득 쌓여, 마치 하얀 베일을 쓴 신부처럼 서 있는 그 나무. 바로 그들이 약속을 했던 그 나무였다. 그 아래 서 있는 작고 어린 두 아이의 모습까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스케치 위로 누군가 힘주어 쓴 글귀가 보였다.
‘그 날의 약속, 잊지 않았기를.’
수연의 손에서 다이어리가 떨어질 뻔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건, 분명… 지훈이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그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을지라도, 그의 습관과 그가 기억하는 약속의 흔적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맑은 풍경종 소리가 울렸다. 그는 돌아왔다.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당황한 듯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다이어리에서 수연의 얼굴로, 그리고 다시 다이어리로 향했다. 길고 깊은 눈빛이 얽혔다.
“제 다이어리…”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갈라지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아주 희미하게 번지는, 과거의 잔상들을.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메이고,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수많은 질문과 외침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그가 다이어리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는 순간, 스치듯 지나가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짧게 고개만 숙인 채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카페 안은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듯했다.
창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꽃들은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끊임없이 흩날렸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 것일까? 그녀는 주머니 속의 나무 눈꽃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손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십 년 전의 약속이, 다시 겨울 눈꽃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이번에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이제는 그에게서 어떤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