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나를 비웃었다.
낡고 해진 옥탑방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은, 마치 나 홀로 비참한 바닥에 처박혀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반짝이는 칼날 같았다.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의 쓴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씹어 삼킬 것도 없는 밤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지난 몇 년이 그랬다.
“강민준….”
갈라진 목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잊고 싶었던 지옥 같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차가운 배신감, 타오르는 증오, 그리고 뼈저린 상실감. 모두 그 녀석의 흔적이었다.
나는 한때 ‘특별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느끼지 못하는 기운을 다룰 수 있었다. 그 힘으로 나는 세상을 지키는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우리는 함께 그런 꿈을 꾸었다. 나 이현수와 강민준.
그 녀석은 나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유일한 이해자였다. 내가 가진 힘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나를 누구보다 깊이 믿어주었던 친구.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한낮의 꿈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
그날, 우리는 도심 깊숙한 곳에서 벌어진 이계의 균열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맹렬한 영적 에너지의 폭풍 속에서, 나는 균열의 핵에 손을 뻗었다. 온몸의 영력을 쏟아부어 그것을 봉인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느껴진 익숙한 온기가 한순간에 싸늘한 칼날이 되어 심장을 꿰뚫었다.
“미안하다, 현수야. 하지만… 이 힘은 나에게 더 어울려.”
강민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잔인했다. 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그의 검은 칼날은 단순히 육체를 꿰뚫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영력을 빼앗고,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주문이었다.
세상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고,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이 뇌리를 덮쳤다. 나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균열의 에너지는 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쓰러진 자리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나의 영력을 흡수한 강민준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홀로 균열을 봉인한 ‘영웅’이 되어 돌아갔다.
나는 그 지옥 같은 잔해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심장을 관통했던 상처는 보이지 않는 흉터로 남아 영원히 아려왔다. 무엇보다, 내가 가졌던 모든 영력을 잃었다. 더 이상 남들처럼 세상을 지킬 수 없었다. 아니,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도 없었다. 영력이 없어진 몸은 일반인보다도 약해져 버렸으니까.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지난 3년간 나는 죽은 듯이 살았다.
***
“뉴스 속보입니다. 강민준 각성자가 이번에도 도시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동부 지역의 영적 불안정 사태는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강민준 각성자는 ‘이것은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라며 겸손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낡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내 귀를 찔렀다. 화면 속 강민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빛나는 슈트를 입고, 수많은 사람의 환호 속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도 위선적이고 역겨웠다. 그는 나의 힘으로 나의 자리에 서서, 내가 꿈꾸던 영웅 행세를 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이 와지끈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뜨거운 커피가 손등에 쏟아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손등의 작은 화상 따위는 내 안에서 들끓는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식었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송곳처럼 심장을 찔렀고, 그 송곳 끝에는 강민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3년 동안 폐허 속에서 헤매는 유령처럼 살았다. 매일 밤 강민준의 얼굴이 꿈속에 나타나 나를 비웃었다.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그 녀석의 잔인한 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동안 너무도 무력했다. 복수심은 사치였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손바닥에서 퍼져 나오던 뜨거운 통증이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으로 바뀌었다. 화상을 입었던 부위가 욱신거리더니, 피부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영력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둡고 낯선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내 안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했다. 절망의 나락에서 피어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 힘.
나는 손을 뻗어 TV 화면 속 강민준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의 환한 미소가 내 손끝에서 일그러졌다.
“강민준…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나는 반드시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네게서 빼앗을 것이다.”
내 눈빛은 더 이상 비참한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심연에서 솟아오른 듯한, 검고 날카로운 광기가 번뜩였다. 잃어버린 힘이 아닌, 오직 복수를 위해 재구성된 새로운 영력이 내 안에서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낡은 옥탑방의 어둠 속에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 끝에 섬뜩한 붉은 기운이 스며드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