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이었다. 온 세상이, 숨 쉬는 공기마저도 탁하고 아득한 회색이었다. 지우는 주저앉아 겨우 발길질로 무너진 상점가의 잔해를 헤집었다. 녹슨 철근과 부식된 유리 조각들이 날카롭게 튀어나온 폐허 속에서, 그가 찾는 건 언제나 희미한 희망뿐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물 한 모금, 음식 한 조각도 입에 대지 못했다. 갈증과 허기가 온몸을 갉아먹는 듯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쉰 목소리가 겨우 터져 나왔다. 먼지로 가득 찬 공기가 폐로 들이차 기침이 터져 나왔다.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지우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 벌써 몇 년째인지, 아니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의미도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희미했다. 마지막으로 푸른 하늘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아니, 그게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널브러진 부스러기들을 더듬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단단한 것이 손에 걸렸다.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닦아내자 금속 특유의 무광택 재질이 드러났다. 닳아 해진 전자 카드였다. 낡았지만, 기묘하게도 녹슬지 않았다. 카드 중앙에는 낯선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세 개의 삼각형이 서로를 향해 맞물려 있는 듯한 형상.
“이게 대체….”
호기심이 지우의 메마른 감각을 자극했다. 그는 카드를 움켜쥐었다. 그 아래, 진흙에 반쯤 파묻힌 채 발견된 것은 너덜너덜한 종이 조각이었다. 방수 처리된 종이인지, 역시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지도가 분명했다. 손바닥만 한 조각이었지만, 평범한 시가지 지도는 아니었다. 복잡한 기호와 선들이 빼곡했다. 그리고 지도의 한 귀퉁이, 방금 발견한 카드와 똑같은 세 개의 삼각형 문양이 박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양이 가리키는 곳을 짚어보니, 지도 상에는 ‘구역 7 – 폐쇄’라고 적혀 있었다. 폐쇄. 그 단어가 지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폐쇄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굳이 특정 구역을 ‘폐쇄’라고 명시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 구역은 다른 의미의 ‘폐쇄’일지도 모른다. 접근 금지, 혹은… 보호 구역?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젠 아무것도 보호받을 수 없어.”
지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지도 조각에 박혀 있었다. 다른 희망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폐쇄 구역. 그곳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가스가 자욱한 죽음의 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뇌리에 박힌 지도의 파편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닳아빠진 배낭을 고쳐 메고, 유일한 무기인 녹슨 쇠지렛대를 고쳐 쥐었다. 폐허의 경계를 넘어,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회색 먼지가 그의 발자국을 뒤덮었다.
***
구역 7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원래도 복잡했던 도시는 붕괴로 인해 미로처럼 변해 있었다.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기어 다녔고, 잔해로 가득 찬 지하도를 통과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독한 재난의 먼지가 들이닥쳐 숨을 헐떡였고, 예상치 못한 붕괴 위험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뿌연 하늘 아래, 오직 지도의 파편만이 그의 길잡이였다.
며칠 밤낮을 헤맨 끝에, 지우는 마침내 구역 7의 경계에 다다랐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른 폐허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른 건물들은 뼈대만 남거나 완전히 무너져 내린 반면, 이곳의 건물은 놀랍도록 온전했다. 매끄럽고 차가운 금속 외벽은 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훼손된 흔적이 거의 없었다. 거대한 직육면체 모양의 건물은 마치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굳건히 서 있었다.
“이게… 뭐지?”
건물 전면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아무런 문양도,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금속 덩어리였다. 문 옆에는 작은 인식 장치가 달려 있었다. 낡았지만, 작동할 것 같았다. 지우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헛된 희망에 들뜬 심장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까 발견한 전자 카드를 꺼내 인식 장치에 대었다.
삐빅-
놀랍게도, 인식 장치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육중한 문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깊고 어두운 침묵이었다. 지우는 쇠지렛대를 꽉 쥐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함정일 수도, 아니면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먹먹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플래시라이트가 없었다. 지우는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 간신히 불을 밝혔다. 오래된 배터리가 간당거렸다. 희미한 불빛이 좁고 긴 복도를 비췄다. 차가운 금속 벽과 매끄러운 바닥. 공기마저도 바깥과는 다르게, 눅눅함 없이 건조하고 서늘했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복도 양쪽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지만,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후, 지우의 눈에 복도 끝에 걸린 안내판이 들어왔다. 희미한 불빛 아래,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프로젝트: 코어]
‘코어?’ 지우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슨 프로젝트였을까. 그때, 그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형체가 들어왔다. 지우는 숨을 멈추었다. 손에 든 쇠지렛대가 땀으로 축축했다. 플래시를 비추자, 쓰러진 형체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사람의 시신이었다. 하지만 다른 폐허에서 보던 시신들과는 달랐다. 완전히 부패하지 않고, 마치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잿빛 먼지가 그를 덮고 있었다.
시신은 한 손에 작은 데이터칩을 움켜쥐고 있었다. 지우는 망설였다.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은 언제나 찝찝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신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데이터칩을 빼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흔적인가.”
데이터칩을 쥔 채, 지우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복도가 끝나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 통제실처럼 보였다. 수많은 모니터와 기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전원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다행히 한쪽 구석에 비상 전원 버튼이 보였다. 지우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걸고 버튼을 눌렀다.
치이잉-
오래된 기계음과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하나둘 깜빡이며 켜지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통제실 내부를 비췄다. 지우는 데이터칩을 꽂을 만한 단자를 찾았다. 다행히 메인 터미널 옆에 그와 똑같은 규격의 슬롯이 있었다. 그가 칩을 꽂자, 메인 화면이 번쩍하고 켜졌다.
[로그 데이터 불러오는 중…]
화면에는 수많은 데이터와 그래프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우는 눈을 깜빡이며 그것들을 쫓았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으로 기록된 듯한 영상 로그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는 지친 얼굴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는 이 연구 시설의 책임자인 이박사입니다.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통신이 두절된 지 벌써…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인류의 진화를 위한 ‘초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대기 중 미세 유기체 ‘더스트’를 통해 인간의 인지 능력을 확장하고,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려 했죠. 하지만…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더스트? 그가 지금껏 마시고 살았던 그 회색 먼지가,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우리가 만들어낸 ‘더스트’는 통제 불능이 되었고, 오히려 유기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변이했습니다. 단순한 먼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체를 서서히 잠식하여, 의식까지 빼앗는 지성체… ‘공허(Hollow)’로 만드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박사는 고개를 숙였다. “이 재앙은… 저희 시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실패, 즉 ‘대규모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은… 끝났습니다.”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웠던 그 환경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끔찍한 결과물이라니.
이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 아주 작은 가능성이나마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더스트’를 정화할 수 있는 ‘정화 챔버’를 개발했습니다. 제한된 구역이지만, 깨끗한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화면 밖 어딘가를 향했다. “하지만 챔버를 활성화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리고 ‘씨앗’이 필요합니다. ‘더스트’의 근원이 되는… 역설적이지만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씨앗’이.”
화면이 멈추고, 지도 하나가 나타났다. 중앙 통제실 바로 아래, ‘정화 챔버’라고 적힌 작은 방과, 그 옆에 ‘씨앗 보관실’이라고 표시된 곳이 보였다.
“씨앗….” 지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통제실을 둘러보았다. 이박사가 말한 ‘정화 챔버’와 ‘씨앗 보관실’은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터미널의 전원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지이잉- 하는 거슬리는 기계음과 함께, 천장의 형광등마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통제실의 한쪽 문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열렸다.
끼이이익-
문틈 너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고,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였다. 지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플래시를 비추자, 어둠 속에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피부는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눈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그들이 이박사가 말한 ‘공허’였다. 지우는 이전에도 이런 존재들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유 없이 방황하며, 마치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움직였다.
‘씨앗’을 찾아야 해. 지우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문 너머로 다른 공허들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없었다. 터미널 지도에 표시된 ‘씨앗 보관실’로 향하는 문을 찾아 지우는 뛰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쇠지렛대가 유용하게 쓰였다. 쾅, 쾅! 몇 번의 강렬한 충격 끝에 문이 부서지며 열렸다.
씨앗 보관실은 중앙에 강화 유리로 된 거대한 원통형 용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심장이 뛰는 듯한 붉은색 구슬이 떠 있었다. 그것이 ‘씨앗’이었다. 동시에 ‘더스트’의 근원이자 희망이 될 수 있는 역설적인 존재.
공허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지우는 구슬을 보며 망설였다. 이것을 사용하면, 대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또 다른 재앙이? 아니면 정말 이 작은 공간에서만큼은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빌어먹을…!”
그는 주먹으로 강화 유리를 내리쳤다. 유리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박사의 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씨앗’은 ‘정화 챔버’에 직접 주입해야 한다. 지우는 다시 통제실로 달려갔다. 공허 하나가 이미 통제실 문턱에 다다라 있었다. 텅 빈 눈동자가 지우를 향해 느리게 돌아갔다.
지우는 정화 챔버를 활성화하는 콘솔을 찾아 헤맸다. 화면에 챔버의 개요와 함께 ‘씨앗 주입구’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는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뒤에서 공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는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패널을 열고, ‘씨앗’이 들어갈 만한 주입구를 발견했다.
그는 씨앗 보관실로 다시 돌아가 구슬을 억지로 꺼냈다. 온몸을 휘감는듯한 섬뜩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구슬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맥동했다. 공허들의 손이 그의 등 뒤로 뻗어왔다. 지우는 몸을 돌려 쇠지렛대로 공허의 팔을 후려쳤다. 텅 비어버린 껍데기 같은 몸은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지우는 다시 콘솔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씨앗을 주입구에 밀어 넣었다. 구슬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를 찾았다. 콘솔 화면에 ‘정화 챔버 활성화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웅- 하는 거대한 진동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공허들이 비틀거렸다. 터미널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고, 건물 전체가 암흑 속으로 잠겼다. 하지만 이내 정화 챔버가 위치한 곳에서 눈부신 백색광이 터져 나왔다. 빛이 모든 어둠을 삼키는 듯했다. 빛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 듯한 소리가 온몸을 관통했다.
지우는 팔로 눈을 가렸다. 그의 주변에 있던 공허들이 빛에 닿자마자,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회색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정화… 정말 정화가 되고 있는 걸까?
점차 빛이 잦아들었다. 지우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정화 챔버를 중심으로, 지름 수십 미터의 원형 공간이 깨끗하게 정화되어 있었다. 잿빛 먼지는 온데간데없었고, 공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투명했다. 벽과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숨을 쉬어 보았다. 더 이상 목을 긁는 텁텁한 기운은 없었다. 깨끗한 공기였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폐 가득 순수한 공기를 채울 수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는 여전히 회색빛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폐허. 하지만 그곳과는 전혀 다른, 작은 원형의 공간 안에서, 지우는 처음으로 희망을 보았다. 그는 이제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어쩌면 이 공간을 확장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맑게 빛나는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흙먼지로 뒤덮였지만, 눈만은 강렬하게 빛나는 한 인간의 모습. 재앙의 진실을 마주한 채, 작은 희망을 움켜쥔 채, 홀로 살아남은 남자였다. 그의 생존기는 이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