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고 거대한 노을이 폐허가 된 도시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이제 썩어 문드러진 잔해와 침묵만이 지배했다. 눅진한 먼지 냄새와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지아는 무릎까지 오는 잡초가 무성한 아스팔트 위를 조용히 걸었다. 낡은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고, 한 손에 든 부러진 야구 방망이의 감촉은 이제 제 몸처럼 익숙했다. 그녀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탐색했다. 잿빛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위협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 같은 현실이 시작된 지도 벌써 2년. 스물다섯의 지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건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오늘은 식량을 찾아야 했다. 며칠 전 발견한 캔 참치는 바닥을 드러냈고, 마실 물도 거의 남지 않았다.

낡은 상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은 깨져 나뒹굴고, 문은 뜯겨 나간 채 텅 빈 어둠을 드러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안전해 보였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밑의 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이곳은 비어 있는 듯했다.

내부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진열대는 쓰러져 있고, 상품들은 바닥에 흩뿌려져 밟힌 자국이 선명했다. 한때 화려했을 색깔들은 모두 바래고 칙칙한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아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물건들 사이를 뒤졌다. 통조림,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 봉지, 찢어진 옷가지들. 쓸모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때였다.
“서걱… 서걱…”
저 안쪽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낡은 상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지아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야구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저건 ‘그것’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불분명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상의와 구멍 난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한쪽 팔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고, 얼굴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시선. 그는 비틀거리며 지아를 향해 다가왔다. 입에서는 듣기 역겨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끄으으…”

지아는 망설일 틈도 없이 방망이를 고쳐 쥐고 달려들었다. 일격에 끝내야 했다. 망설임은 죽음을 부르는 지름길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그로테스크한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지아는 확인 사살로 한 번 더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고, 지아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쯤이면 이 싸움이 익숙해질까. 언제쯤이면 죄책감 없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수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구석의 선반 뒤에서 작은 비상 식량 상자를 발견했다. 안에는 캔에 든 통조림 몇 개와 비스킷, 그리고 작은 물병이 들어 있었다. 작은 희망이 그녀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상자를 배낭에 넣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것들’의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흐읍… 으윽… 살려… 줘…”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고통에 찬 비명. 지아의 손이 멈칫했다.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남을 돕는 것은 곧 자신에게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서로를 외면했고, 심지어는 해치기도 했다. 지아 자신도 몇 번이나 그런 딜레마에 부딪혔던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메마르지 않은 인간성이 그녀를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예전에 그녀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쓰러져 가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야구 방망이를 쥐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밖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주차된 차량들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도로변이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곳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노인의 다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두 마리의 ‘그것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노인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상황이었다. 지아는 망설일 틈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이쪽이야!”

그것들은 지아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눈동자가 지아를 향했다. 노인은 지아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눈을 떴다.

“젊은이… 도망쳐…”

하지만 지아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노인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그것들’ 중 하나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한 마리가 쓰러졌다. 남은 한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지아는 몸을 날려 피하고는 재빨리 뒤돌아 그놈의 머리를 노려쳤다. 두 번째 ‘그것’도 바닥에 고꾸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지아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다리는 심하게 찢겨 있었다. 감염된 것은 아니었지만, 출혈이 심했다.

“괜찮으세요? 이봐요, 괜찮으세요?”

“흐읍… 젊은이…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다고 할 상황이 아니에요. 당장 상처를 지혈해야 해요.”

지아는 배낭에서 거즈와 소독약을 꺼내 노인의 상처에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노인은 고통에 신음했지만, 묵묵히 참아냈다.

“이름이 뭐요?” 노인이 물었다.

“지아예요. 아저씨는요?”

“난 김 씨라고 하네. 김 노인이라고 부르면 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지.”

“떠돌아다니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아는 상처를 대강 처치한 후 노인을 부축했다. 노인의 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갈 곳은 있어요?” 지아가 물었다.

“글쎄… 예전 같으면야 갈 곳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는 신세지. 자네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나?”

“저는… 식량을 구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아저씨를 만난 거죠.”

김 노인은 지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지친 기색과 함께 연륜이 담겨 있었다.

“그럼 나와 같이 가는 게 어떤가? 이 근방을 좀 아네. 지하 주차장 하나를 알고 있지. 그나마 안전할 걸세.”

지아는 잠시 고민했다. 혼자라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노인의 부상으로는 혼자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어쩌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지도 몰랐다.

“좋아요. 안내해 주세요.”

김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느릿느릿 폐허가 된 도시의 골목길을 헤쳐 나갔다. 지아는 주변을 경계하며 김 노인을 부축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그것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불길한 예감.

“서두릅시다, 김 노인. 아무래도…”

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거리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수십 마리의 ‘그것들’이 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이 근방에 있던 모든 ‘그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젠장! 저렇게 많다고?” 김 노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도망칠 곳은 마땅치 않았다. 김 노인의 다리로는 저 무리를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지아는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싸운다면 무조건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김 노인, 저쪽으로 갑시다!” 지아는 눈앞의 건물 잔해를 가리켰다. 벽이 무너져 생긴 틈새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실로 연결된 곳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 노인은 고통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끔찍한 신음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간신히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은 캄캄했다. 지아는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서 앞을 비췄다. 좁은 통로가 이어지고, 그 끝에는 낡은 철문이 보였다.

“이, 이곳인가?” 김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네, 서둘러요!”

그들은 철문까지 기어갔다. 철문은 묵직하고 낡아 있었다. 지아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은 컴컴한 지하 공간이었다.

“김 노인, 먼저 들어가요!”

지아는 김 노인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등 뒤에서 ‘그것들’의 손톱이 철문을 긁는 소리가 ‘끼이이익!’ 하고 들려왔다. 지아는 온몸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낡은 잠금쇠를 찾아 겨우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읍… 흐읍…”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들’의 긁는 소리가 철문을 통해 울렸다. 그러나 이곳은, 적어도 지금은 안전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이 희미하게 보였다. 낡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구석에는 먼지 쌓인 자동차 몇 대가 보였다.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같았다.

“고맙네… 지아. 자네 덕분에 살았어. 두 번이나 말이야.” 김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천만에요. 저도 혼자서는 저 무리를 감당 못 했을 거예요.”

지아는 배낭에서 비상 식량 상자를 꺼냈다. 통조림과 비스킷, 물병.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나누어 먹었다. 비록 차갑고 맛없는 통조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진수성찬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이젠 어쩌지?” 김 노인이 물었다.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김 노인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지친 체념이 묻어났다.

“모르겠어요. 일단 여기서 좀 쉬다가… 다음 계획을 세워야겠죠.”

김 노인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지아에게 건넸다. 차가운 금속 조각이었다. 지아는 플래시를 켜서 비춰보았다. 낡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작은 나침반이었다.

“오래된 것이지만…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걸세. 난 이제 이런 거 필요 없어. 자네가 가져.”

지아는 나침반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나침반은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은 길을 안내하는 도구이기 이전에, 그녀와 김 노인 사이에 생긴 작은 유대감의 증표 같았다.

“하지만… 김 노인도 같이 가야죠.” 지아가 말했다.

김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이 늙은이 돌봐줄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자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지.”

지아는 나침반을 꽉 쥐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숨 쉬고 심장이 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홀로 살아남는 것은 고독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고 늙은 동반자와 함께라면,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도 어쩌면… 어쩌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밖에서는 여전히 ‘그것들’의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고, 그들은 여전히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지아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잠시 동안 응시했다. 어딘가로 향하는 방향. 희망이나 목적이 아닐지라도,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작은 예감. 그녀는 김 노인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랜만에 짓는, 희미하지만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녀의 여정은 이제 막 새로운 방향을 찾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