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은 텅 비어버린 도시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불안하게 눈을 떴다. 머리가 욱신거렸고, 주변의 풍경은 마치 지독한 악몽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익숙한 네온사인 대신,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핏빛 노을 아래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다. 먼지가 가득한 공기는 쇠붙이 타는 냄새와 알 수 없는 비린내로 얼룩져 있었다.
“이게… 대체…”
목소리는 갈라지고 말랐다. 그는 자신이 며칠 전 낡은 고물상에서 발견한, 기이한 금속 장치를 손에 넣었을 때로 기억을 되감았다. 호기심에 작동시켜본 것뿐인데, 세상이 뒤집어지듯 아수라장이 되더니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장치는 이제 그의 손목에 낡은 시계처럼 채워져 있었다. 유리가 깨지고 금속이 녹아내린 듯 흉한 몰골이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갈증이 극심했다. 며칠을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이 장치 때문에 시간 자체가 뒤틀려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문명의 흔적들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지옥도였다. 거대한 빌딩들은 속이 텅 빈 채 뼈대만 남았고, 아스팔트 도로는 쩍쩍 갈라져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기괴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이 메아리쳤다.
“망했군.”
이준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알던 세상은,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혹시 꿈일까? 그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그가 지금 현실에 있음을 증명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방법도 없었다. 그는 그저 살아남아야 했다.
첫 며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물 한 모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고, 먹을 것이라곤 쓰러진 건물 잔해 속에서 찾은 곰팡이 핀 비상식량이 전부였다. 밤이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배회했고, 이준은 폐허가 된 상점 건물 안 구석에서 쥐죽은 듯 숨을 죽여야 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말라갔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어느 날, 그는 무너진 병원 건물 안에서 필사적으로 물을 찾고 있었다. 빗물이 고인 곳은 있었지만, 흙먼지와 알 수 없는 부유물로 가득했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너. 뭘 찾고 있지?”
이준은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한 여자가 벽 그림자 속에 녹아들 듯 서 있었다. 검은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녀는 온몸에 낡은 가죽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손에는 녹슨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매서운 짐승 같았다.
“물… 물을 찾고 있었어요.” 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여자는 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물을?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새로 떨어진 건가?”
“새로 떨어졌다고요?”
“그래. 가끔 이렇게 과거에서 ‘뒤틀려’ 오는 녀석들이 있지. 대부분은 며칠 못 가 죽지만.”
그녀의 말에 이준은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서 왔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고 ‘뒤틀렸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그녀는 이준에게 다가와 그의 손목에 채워진 장치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고물상에서 주웠나 보네. 이 낡은 쓰레기가 아직도 작동하다니. 조상들이 만든 건 참 질기지.”
“이게 뭔지 아세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가끔 이런 물건들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든다는 소문은 돌았어. 어쨌든, 네가 뭘 찾고 있든 간에, 여기선 혼자 살아남기 힘들 거야.”
그녀는 땅에 떨어진 낡은 통조림 캔 하나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나는 세라. 너는?”
“이준입니다.”
“이준. 좋아, 이준. 우리 거래를 하자. 난 이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위험한 곳과 안전한 곳을 구별할 수 있어. 넌… 뭐라도 쓸모 있는 게 있겠지, 과거에서 왔으니까.”
이준은 망설였다. 이 여자를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지식은 이 황폐한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쓸모 있는 방법을 몰랐다.
“뭘 원하죠?” 이준이 물었다.
“날 따라와. 그리고 내가 찾는 걸 도와줘. 내가 찾는 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거든.”
그렇게 이준은 세라와 동행하게 되었다. 세라는 거칠었지만, 탁월한 생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쥐새끼처럼 폐허 속을 헤집고 다니며 물과 식량을 찾아냈고, 밤에는 잠자리와 불을 만들었다. 그녀의 단검은 위협적인 생물들을 물리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봐, 세라.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야? 희망이라고 했잖아.”
걷고 또 걸으며 황량한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던 어느 날, 이준이 물었다. 며칠간 그들은 오직 서로의 등만 보며 묵묵히 나아갔을 뿐이었다.
세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을 가리켰다. 그것은 한때 거대한 댐이었을 법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쩍쩍 갈라져 있고, 그 위로 기괴한 녹색 이끼 같은 것이 뒤덮여 있었다.
“저기, 저 댐 아래에 ‘녹색 정원’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 세라가 말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오염되지 않은 물과… 씨앗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어. 이 모든 게 시작되기 전의 씨앗들.”
“씨앗이요?” 이준은 놀랐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씨앗이라니.
“그래. 이 끔찍한 오염이 시작되기 전의 씨앗. 이곳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그들의 목적지는 명확해졌지만,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댐 근처로 갈수록 이상한 변종 동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맹금류와 늑대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으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세라는 이들을 ‘그림자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밤, 그들은 댐 근처의 폐건물 안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 사냥꾼이었다.
“젠장, 수가 많아!” 세라가 이를 갈았다.
건물은 사방이 뚫려 있어 방어하기에 불리했다. 이준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이대로 여기서 죽는 건가? 문득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지식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군에서 받은 비상 훈련, 어릴 적 과학 시간…
“세라, 저기 저 기둥들 좀 봐요!” 이준이 손가락으로 건물 내부의 낡은 철골 기둥들을 가리켰다. “저 철골들이 무너지면 건물이 무너질 거예요. 건물 전체가 덫이 될 수 있어요!”
“어떻게 그걸 무너뜨려?” 세라가 급하게 물었다.
“저 기둥들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제가 지시하면, 저 기둥 밑에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해요.”
이준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공구들과 철근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녹슨 쇠막대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재빠르게 철골 기둥의 약한 부분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세라도 이준의 말을 믿고 단검과 돌로 다른 기둥의 기반을 공격했다.
그림자 사냥꾼들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이준은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이에요! 무너뜨려요!”
세라가 힘껏 철골 기둥을 내리치자, 균형을 잃은 기둥이 크게 흔들리며 건물의 다른 기둥들을 연쇄적으로 쓰러뜨렸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폐건물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림자 사냥꾼들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잔해 더미에 깔려버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그들이 만들어낸 소음은 이준과 세라의 귓가를 맴돌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세라는 놀란 눈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런 젠장… 너 정말 대단하잖아?”
이준은 헐떡이며 웃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들은 댐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댐의 심장부에는 낡은 철문이 있었다. 녹슬어 잘 열리지 않는 문을 힘겹게 열자,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두운 통로 끝, 거대한 지하 공간 전체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인공 조명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상쾌했다. 마치 폐허 속에서 발견된 기적 같았다.
“녹색 정원…” 세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이준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찾던 희망이 여기 있었다. 이 공간 한가운데에는 낡은 컴퓨터와 수많은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다. 유리병 안에는 ‘밀’, ‘쌀’, ‘콩’, ‘사과’ 등 익숙한 글자들이 적힌 씨앗들이 가득했다.
컴퓨터를 살펴보니, 이 정원이 만들어진 목적과 관리 방법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도 함께였다. 극심한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 그리고 그로 인한 전쟁… 이준이 알던 세상의 종말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비극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세라가 이준에게 물었다. “이걸로 세상을 다시 바꿀 수 있을까?”
이준은 씨앗이 담긴 유리병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장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과거의 지식과 미래의 희망이 만나는 곳.
“바꿀 수 있을 거야. 아주 천천히, 그리고 힘들겠지만.” 이준은 씨앗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과거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 이 식물들을 어떻게 키우고, 물을 어떻게 정화하는지. 그리고 너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지.”
세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그녀의 굳은 얼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 이준. 다시 시작해보자고.”
그들은 녹색 정원 안에서 첫 씨앗을 심었다. 작은 씨앗 하나가 황폐해진 세상에 희미한 희망의 빛을 던졌다. 이준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고, 이제는 이 미래를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그의 시간 여행은 끝났지만, 그의 진짜 생존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 아주 작은 씨앗들이 움트기 시작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