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 씨, 제발 인간처럼 좀!
어둑어둑한 저녁, ‘오늘의 서재’ 간판의 낡은 백열등이 깜빡거렸다. 이하은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한 손엔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잔을, 다른 한 손엔 읽던 책을 들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차가 식어가는 소리, 그리고 가끔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자동차 소리. 서른 살, 이하은의 일상은 이토록 고요했다. 평화롭고, 때로는 무료했다.
그 무료함이 산산조각 난 것은, 말 그대로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였다.
“안녕하세요.”
나직하지만 귓가를 부드럽게 맴도는 목소리. 고개를 들자, 하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의 남자였다. 날렵한 콧대, 살짝 처진듯한 눈꼬리는 어딘가 애수에 젖은 듯했고, 희고 고운 피부는 서점의 칙칙한 조명 아래서도 자체 발광하는 듯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 잘 다려진 코트까지. 이런 남자가 동네 구석의 낡은 서점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길을 잘못 든 관광객이거나,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신종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스쳤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남자는 서점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더니, 진열된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길이 어딘가 좀 특별했다.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관찰하는 듯한 순진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종이로 만든 이야기입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한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은은 얼떨떨했다. ‘종이로 만든 이야기’라니. 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가?
“네, 맞아요. 그걸 책이라고 부릅니다만.”
하은이 설명하듯 답하자, 남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책’이로군요. 신기합니다. 이야기는 말로 전해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 진짜인가?’ 하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책을 모를 리가. 혹시, 콘셉트? 무슨 촬영이라도 하는 건가?
“요즘은 다들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자체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죠.”
하은은 평소처럼 애써 덧붙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가장 오래된 듯한, 표지가 너덜너덜한 고전을 집어 들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럼… 이 책을 읽으면 저도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네? 그건… 좀 다른 의미인데요.”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은은 한숨을 쉬었다.
“음,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겁니다. 직접 들어가는 게 아니라요.”
“아아.” 그는 조금 실망한 듯했다. “그렇다면 저는 직접 경험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만.”
“손님, 그건 뭐… 판타지 영화 같은 데서나 가능한 이야기고요.”
하은의 말에 남자는 다시 어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 서점에서는 제가 직접 경험할 만한 것을 팔지는 않습니까?”
하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남자의 진지한 눈빛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책만 팝니다. 직접 경험하시려면 여행을 가시거나, 공연을 보러 가시거나… 해야 할 것 같네요.”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불쑥 물었다.
“혹시, 이 서점에서 가장… 음… 가장 생기로운 이야기가 담긴 책은 무엇입니까?”
하은은 다시 당황했다. ‘생기로운 이야기’라니. 대체 무슨 기준으로?
“어떤 장르를 좋아하시는데요? 로맨스? 판타지? 아니면…”
“제가 아직 인간의 장르에는 익숙지 않아서요. 그저… 저에게 특별한 기운을 주는 이야기라면 좋겠습니다.”
하은은 그 남자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기운’이라. 이상한 사람이군.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은 맑고 순수했다. 그녀는 결국 오래된 먼지 낀 책장 한 구석에서, 낡았지만 깊은 통찰이 담긴 에세이집 한 권을 골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어떠세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이 담겨 있어요.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하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깊고 맑은 눈빛에 하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고맙습니다. 당신에게서도… 아주 생기로운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계산대로 가서 지갑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 지폐는 빳빳하고 새것 같았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꺼내는 그의 손길에서 하은은 다시 한번 기묘함을 느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하은은 평소라면 묻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김도윤이라고 합니다.”
김도윤. 이름조차 그림 같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남기고 서점을 나섰다. 쨍그랑, 문에 달린 풍경이 울렸다.
하은은 남자가 사라진 문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이미 다 식어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가슴 한쪽이 아까 그 남자의 말처럼 ‘생기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도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저녁 서점에 나타났다. 그는 항상 같은 에세이집을 손에 들고 있었고, 그 책을 다 읽었는지 매번 새로운 질문을 쏟아냈다.
“이 작가는 왜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표현한 겁니까? 물이 흐른다면,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왜 인간은 이렇게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존재들은 분노나 기쁨, 이 두 가지로 충분한데 말이죠.”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삶은 결국 홀로 걷는 길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당신은 이리도 많은 책들을 통해 다른 이들의 길을 함께 걷도록 돕는 겁니까?”
하은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질문들에 답하는 것에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김도윤은 정말로 ‘책’이라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있는 듯했다. 그의 순진한 물음들은 때로는 하은에게도 잊고 있던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곤 했다.
“도윤 씨는 어쩌면 이렇게… 호기심이 많으세요? 마치 아이 같아요.”
어느 날, 하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라고요? 제가요? 저는… 사실 꽤 오래 살았습니다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하은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런 말 자주 들을 것 같긴 해요. 너무 동안이셔서요.”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하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은… 참 따뜻한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오면 편안합니다.”
그의 말에 하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 노골적인 칭찬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의 엉뚱함은 서점을 넘어 일상으로 침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서점 앞 고양이 밥을 주던 하은에게 도윤이 다가왔다.
“하은 씨, 저 고양이와 제가… 혹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는 허리를 숙여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며 그의 손에 제 몸을 비비는 것이 아닌가. 평소 하은에게는 도도하기 짝이 없던 녀석이었다.
“어머, 쟤가 원래 저렇게 살가운 애가 아닌데…”
하은이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사이, 도윤은 고양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고양이의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영특해 보였다.
“도윤 씨는 동물과 교감이 특별한가 봐요?”
“음… 네, 그럴지도요.” 도윤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또 다른 날에는 서점의 낡은 수도관이 터져 물이 새는 일이 발생했다. 하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는데, 마침 서점에 들른 도윤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글쎄 수도관이 터졌나 봐요. 아저씨 부르긴 했는데, 물이 계속 새서…”
도윤은 잠시 수도관을 유심히 보더니, 손가락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던 물줄기가 거짓말처럼 약해지더니 이내 똑, 똑 떨어지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어? 어머! 도윤 씨가 뭘 하신 거예요?”
“별것 아닙니다. 그저… 물의 흐름을 조금 멈춰 세운 것뿐입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하은은 눈을 비볐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하은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윤은 늦은 밤 서점 문을 닫는 하은을 기다려 함께 골목길을 걷곤 했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그의 눈빛은 묘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하은은 가끔 그의 등 뒤에서, 아홉 개의 그림자가 언뜻 스치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착각이라고 믿으려 했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서점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윤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하은은 계산대에서 고요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서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이하은 씨, 맞습니까?”
문간에 서 있는 것은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 남자였다. 낡은 한복을 입고, 그의 뒤로는 갓을 쓴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하은은 순간 얼어붙었다.
“누구… 세요?”
“저는 구미호족의 김 상궁이라 합니다. 당신 곁에 있는 그 자, 김도윤을 찾으러 왔습니다.”
하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구미호족’이라니.
도윤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온화한 미소 대신, 차갑고 단호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궁님,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어찌 이곳까지 오지 않겠느냐! 네 이놈, 인간 세상에 내려온 지 수백 년,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혼례를 치러야 할 때가 아니더냐! 헌데 이 어미의 속을 태우고 인간 여자와 어울리고 있다니!”
‘어미’라는 말에 하은은 충격에 빠졌다. 김 상궁은 도윤의 어머니라는 말인가? 그리고 ‘수백 년’이라는 말.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제 연을 제가 찾겠다고.”
“연은 무슨 연! 이 어린 것이 저리도 생기로운 기운을 뿜어내니, 네 이놈이 저 아이의 기운을 다 뺏어 먹을까 걱정이로구나!”
‘생기로운 기운’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하은의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기운을 뺏어 먹는다’는 말은…
하은은 도윤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그녀가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아홉 개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가 아닌, 진짜였다.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은빛 꼬리 아홉 개.
“도윤 씨… 이게… 다 뭐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도윤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은 씨… 저는… 저는 구미호입니다.”
그의 고백에 하은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구미호.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존재. 그녀는 애써 믿으려 하지 않았던 모든 기이한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책을 모르는 것, 동물과 교감하는 것, 물의 흐름을 멈추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서 ‘생기로운 기운’이 느껴진다는 말까지.
“기운을 뺏어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하은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김 상궁이 혀를 찼다. “이 어린 것이, 순진한 인간을 홀려 정기를 빨아먹으려 하는 게 아니더냐!”
도윤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하은 씨의 정기를 탐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그저 하은 씨의 따뜻하고 생기로운 기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미 하은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기를 빨아먹는 구미호. 그녀의 가슴속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나가주세요…” 하은은 겨우 말했다. “모두… 나가주세요.”
도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그는 어머니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하은에게 다가왔다. 하은은 뒷걸음질 쳤다.
“하은 씨,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정말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끌린 건… 당신의 순수한 기운 때문이었어요. 저는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며 지쳐 있었습니다. 당신의 곁에 있으면… 마치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의 눈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하은은 그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갈망,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본능적인 무언가를 보았다. 금지된 사랑. 종족을 뛰어넘는 위험한 사랑.
하은은 혼란스러웠다. 두려웠지만, 그와의 짧은 시간 동안 쌓였던 정이, 그리고 그가 보여주었던 순수함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도윤 씨…”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김 상궁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도윤아! 네 이놈! 인간에게 홀려 우리의 본분을 잊었더냐! 이리 오너라!”
도윤은 몸을 돌려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서점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하은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이 소동이 커지면 서점은 물론, 동네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그는 평화로운 일상과는 영영 멀어질 터였다.
“김 상궁님!” 하은은 벌떡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도윤 씨와… 할 말이 있습니다.”
김 상궁은 코웃음을 쳤다. “인간 주제에 어디 감히…!”
“어머니!” 도윤이 소리쳤다. “제발! 하은 씨를 존중해 주십시오.”
김 상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허나 오래 기다릴 수 없다.”
하은은 도윤의 손을 잡아끌어 서점 안쪽의 작은 창고 겸 휴게실로 데려갔다. 좁은 공간에 둘만 들어서자, 하은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자, 이제 설명해 봐요. 구미호 씨.”
도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려야 했는데…”
“그래요. 처음부터 다 이야기했어야죠! 왜 거짓말했어요? 제가 당신의 기운을 탐할까 봐 무서웠다구요!”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당신의 기운은 너무나 순수해서, 저도 모르게 당신 곁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활력은 저를… 다시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를 구미호라고 알면, 분명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하은은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겪었을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래서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제 곁을 맴돌았다구요? 이건 아니잖아요!”
“정말 미안합니다, 하은 씨. 하지만… 저는 당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이, 서점 주인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이, 그리고 당신의 그 생기로운 기운이… 모든 것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하은은 혼란스러웠다. 이 남자는, 아니 이 구미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에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엉뚱함에 웃었고, 그의 순수함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은, 그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럼… 당신 어머니는 왜 저에게서 기운을 뺏어 먹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진짜 저를 해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구미호의 본능을 걱정하는 겁니다. 제가 아직 본능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시기라서… 하지만 저는 정말, 하은 씨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맹세합니다.”
그는 진심 어린 눈으로 하은을 바라봤다. 하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일단… 당신 어머니부터 어떻게 좀 해봐요. 서점 문 닫아야 하는데 계속 저러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예요?”
도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은 씨.”
하은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채,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휴게실 문을 열고 김 상궁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긴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하은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머니, 저는 제 선택을 따를 것입니다. 다시는 인간의 정기를 탐하지 않고, 하은 씨 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겠습니다.”
“네 이놈! 그게 쉬운 줄 아느냐!”
“쉬울 리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습니다.”
김 상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허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정기를 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네가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이치. 만약 네가 본 모습을 잃고 그저 평범한 인간이 된다면, 그때는 혼례를 치르도록 하라. 허나… 너는 구미호다. 네 본능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 상궁은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섰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함께 사라졌다. 쨍그랑, 서점 문이 닫혔다.
고요함이 다시 찾아왔다. 빗소리만이 뚝, 뚝 서점 창문을 두드렸다.
도윤은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조금은 홀가분해 보였다.
“어머니께서… 당분간은 저를 지켜보시겠다고 하십니다.”
하은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구미호와의 사랑이라니. 이건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하은 씨, 저는… 정말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이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하은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뺨에 손을 댔다.
“정말… 저 안 해칠 거죠?”
“맹세합니다. 저의 모든 꼬리를 걸고 맹세합니다.”
하은은 그의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아요. 일단… 당신에게 인간 세상 적응 훈련부터 시켜야겠네요. 어머님께 당당하게 ‘나 이제 인간이랑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요.”
도윤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그의 눈빛은 아홉 개의 별이 박힌 듯 반짝였다.
“그럼… 저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글쎄요. 인간 세상의 연애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여우 씨. 데이트 신청부터 다시 해보세요. 그리고… 제발 앞으로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종이로 만든 이야기’ 같은 거 말고, ‘책’이라고 부르세요.”
하은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도윤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아홉 개의 꼬리가 너무나 행복한 듯 살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은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꼬리… 좀 숨겨주세요. 손님들이 놀라잖아요.”
도윤은 당황하며 꼬리를 황급히 감추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또 너무나 어설펐다. 하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남자와 함께라면 그녀의 고요했던 일상은 더 이상 무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서점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생기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지된 사랑? 위험한 사랑? 괜찮았다. 여우 씨, 이제 인간처럼 좀 살아봐야죠. 나랑 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