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영석 (幻影石)
밤은 늘 고요했다. 지훈에게 밤은 도피처이자, 동시에 끝없이 이어지는 고독의 그림자였다. 회색빛 도시의 팍팍한 삶 속에서 그는 어떠한 특별함도, 의미도 찾지 못했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톱니바퀴처럼 굴러갈 뿐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퇴근길 익숙한 골목 대신 낯선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 때문이었다.
어둑한 골목길 구석,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낡고 허름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만물상’. 먼지가 쌓인 유리창 너머로 오래된 물건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발길이 멈춰졌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그를 맞았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웠다. 천장까지 닿을 듯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 낡은 시계, 빛바랜 액자, 깨진 도자기 조각들. 그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았다. 가게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발소리를 죽이며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선반 가장 깊숙한 곳, 다른 물건들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던 곳에 손바닥만 한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흙먼지로 뒤덮여 검게 변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이한 끌림이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흙먼지를 손으로 닦아내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드러났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들은 마치 고대의 언어 같기도, 생명체의 혈관 같기도 했다. 그 문양들은 어두운 돌 표면 위에서 미묘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이건… 뭔가요?”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낡은 카운터 뒤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있었다. 노인은 돋보기 안경 너머로 지훈의 손에 들린 돌멩이를 응시했다.
“아, 그걸 집어 드셨군. 흔치 않은 돌이지. 아주 오래전에 어느 탐험가가 폐허에서 가져왔다던가… 정확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좀 기묘하게 생긴 돌일 뿐.”
노인은 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훈은 그저 ‘기묘하게 생긴 돌’이라는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주고 돌을 샀다. 노인은 말없이 돈을 받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돌을 깨끗이 씻었다. 물에 닿자 문양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손끝으로 문양을 따라가자 차가운 돌 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돌을 침대 옆 탁자에 두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왠지 모를 활력이 느껴졌다. 회사로 향하는 길, 평소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행인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해상도가 높아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돌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와는 다른,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지훈을 늘 괴롭히던 박 과장이 옆을 지나며 빈정거렸다.
“어이, 김 대리. 어제 제출하라는 보고서는 다 됐어? 느려 터져서 원.”
평소 같으면 속으로만 삭였을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지훈의 손에 들린 돌이 묘하게 떨렸다. 그는 박 과장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양반, 오늘 중요한 회의 있는 거 깜빡했으면 좋겠네.’
점심시간, 지훈은 박 과장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박 과장은 중요한 회의 시간을 착각하여 불참했고, 이사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했다고 했다. 지훈은 섬뜩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그날 저녁, 지훈은 돌을 다시 응시했다. 돌에 새겨진 문양들이 어렴풋이 빛을 내는 듯했다. 그는 시험 삼아 돌을 손에 쥐고 떠올렸다. ‘이웃집 여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으면 좋겠다. 늘 시큰둥했잖아.’ 잠시 후, 복도에서 마주친 이웃집 여자가 환한 미소와 함께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훈 씨. 좋은 밤이에요.”
지훈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이 돌이 그의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때부터 지훈의 일상은 미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돌을 이용해 사소한 욕망들을 충족시켰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얻고, 붐비는 카페에서 원하는 커피를 먼저 받고, 귀찮은 업무를 동료에게 넘기는 등. 그의 주변 사람들은 지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그들의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그의 의지에 따라 조종되는 듯했다.
점점 더 대담해졌다. 한 번은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고백을 해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돌을 쥐고 그녀를 떠올렸다. ‘나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고 싶다.’ 다음 날, 그녀는 지훈에게 먼저 다가와 수줍게 고백했다.
“지훈 씨… 사실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황홀감과 동시에 섬뜩한 공포가 밀려왔다. 이것은 진정한 감정이 아니었다. 조종된 환상일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진정한 감정 대신, 텅 빈 인형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행복은 모래성처럼 허무했다.
밤마다 돌을 쥐고 잠들었다. 돌은 이제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일부가 되었다. 돌에 새겨진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꿈속에서는 문양들이 뱀처럼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그것은 그의 욕망을 속삭였다. ‘더 원하는 것을 가져라. 너는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
어느 날,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걸린 프레젠테이션 날이었다. 지훈은 완벽하게 준비했으나, 경쟁 팀의 프레젠테이션이 너무나 뛰어났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때, 그의 주머니 속 돌이 강하게 진동했다.
‘저들의 프레젠테이션은 형편없다.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게 해라.’
그의 생각은 명령이 되었다. 잠시 후, 경쟁 팀 발표자의 목소리는 갑자기 갈라졌고, 준비된 슬라이드는 알 수 없는 오류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심지어 청중들은 아무도 그들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결국 그들은 실패했다. 지훈의 팀은 승리했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고,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훈은 그들의 눈 속에서 또 다른 텅 빈 인형들을 보았다. 그들의 환호는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의 칭찬은 그가 조종한 결과일 뿐이었다. 지훈은 점차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든 관계가, 그의 의지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주변은 온통 환영으로 가득 찬 거대한 무대처럼 느껴졌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져 있었다. 돌의 문양들이 그의 팔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돌의 힘일까, 아니면 자신이 서서히 미쳐가는 걸까?
어느 날 밤, 지훈은 돌을 부수기로 결심했다. 이 악마 같은 돌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망치를 들고 돌을 내려쳤다. 쨍그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돌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돌이 부서진 자리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순식간에 그의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헉…!”
지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아우성쳤다. 그것은 돌에 갇혀 있던 고대의 힘들이었다. 그 힘들은 이제 돌이라는 육신을 잃고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너는 이제 우리다… 우리는 너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머리는 맑았고, 몸은 가벼웠다. 침대 옆 탁자에는 부서진 돌 조각들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목에는 어제까지 없었던, 낯선 문양들이 마치 문신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지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군.”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돌은 필요 없었다. 그 힘은 그의 안에서, 그의 살과 피 속에서, 그의 영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훈은 거리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미묘한 빛이 어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조종당하는 환상에 갇힌 자가 아니었다. 환상을 만드는 자가 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 심리 게임의 유일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세상은 이제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