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윤은 ‘페이지의 속삭임’이라는 작은 책방 카페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밖은 아직 첫눈이 내리기 전이었지만, 유리창에는 이미 겨울의 숨결이 서려 희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창문에 작은 눈꽃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섬세하고 깨끗한 꽃잎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니, 온 세상이 고요해지는 듯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김이 콧등을 간지럽혔지만, 서윤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창밖의 풍경은 흐릿한 수채화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선명한 하나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해 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던 바로 그날의 풍경이었다.
그 겨울, 눈꽃 아래 맹세
그때도 오늘처럼 불쑥 찾아온 추위와 함께 첫눈이 내렸더랬다.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 어귀를 흰 눈이 포근히 덮었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키는 듯했다.
지후는 눈밭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코끝이 빨개지고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의 눈빛만은 따뜻했다. “서윤아, 이리 와 봐.”
그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푹푹 빠지는 눈밭 위를 걷는 것이 마냥 즐거웠던 그때, 지후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내 마음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봐, 서윤아. 눈꽃이 얼마나 예뻐?”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꽃 하나는 여섯 개의 완벽한 팔을 가진 작은 별처럼 빛났다. “우리,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 눈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를 기다리자. 약속해.”
그의 진심이 담긴 눈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따뜻한 숨결이 내 귓가를 스쳤다. “약속해, 지후야. 이 눈꽃이 다시 내릴 때까지.”
그 약속은 순수하고, 투명했으며, 영원할 것만 같았다.
차가운 현실의 그림자
서윤은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깨어나 다시 차가운 유리창을 응시했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그 약속은 그녀의 유일한 빛이자, 때로는 숨통을 조이는 족쇄가 되었다. 작가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왔던 지난 시간들. 작은 작업실의 임대료는 매번 그녀를 압박했고, 물감 하나 살 때도 망설여야 하는 현실은 눈앞의 눈꽃처럼 깨끗했던 꿈을 자꾸만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찻잔만큼이나 차가운 현실은 가끔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지후의 약속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가 이 약속을 잊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때때로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 한편에 작은 불씨를 품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아니, 그가 돌아와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뜻밖의 소식
“서윤아, 또 그렇게 넋 놓고 앉아 있냐?”
경쾌한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에 젖어 있던 공간을 깨트렸다. 고개를 들자, 활짝 웃는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유진은 서윤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장 현실적인 조언자였다.
“괜찮아, 유진아. 그냥 좀 멍 때리고 있었어.”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진은 서윤의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요즘도 그림은 잘 돼가? 작업실 월세는 괜찮아? 요즘 재료 값도 많이 올랐다며.” 유진은 서윤의 걱정거리를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겨우 버티고 있어. 그래도 손 놓을 순 없잖아.”
유진은 서윤의 진심을 알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다릴 거야? 이젠 좀 놓아줄 때도 됐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서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유진도 알고 있을 터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유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얼마 전에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던데, 지후가… 한동안 해외에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아주 외진 곳에서.”
서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후.’ 그 이름 석 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해외? 외진 곳?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불안감과 희망이 뒤섞여 그녀의 내면을 흔들었다.
“아직 연락은 안 되는 것 같아. 워낙 변두리라던데…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쉬운 곳은 아니었나 봐.” 유진의 말은 가늘고 긴 실처럼 서윤의 불안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 지후가 힘들었을까? 아팠을까?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디… 어딘데?” 서윤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유진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정확히는 몰라. 워낙 오래전 얘기기도 하고, 나도 건너 들은 거라.”
다시 내리는 눈꽃
유진이 떠나고, 서윤은 다시 혼자 남겨졌다. 창밖은 이제 정말 겨울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하늘에서 첫눈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작고 희미한 눈송이들이 창가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손거울을 들어 올렸다. 지후가 그녀에게 주었던, 눈꽃 모양이 새겨진 거울이었다. 거울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먼 곳에서 무사했을까? 그도 자신처럼 이 눈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는 손거울을 꽉 쥐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하얀 눈송이들이 춤을 추듯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려는 듯이.
서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지후가 어딘가에서 살아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낼 것이라는 맹세였다.
“지후야… 이 눈꽃이 다시 내리고 있어. 너는 어디에 있니? 나… 너를 기다리고 있어.”
창밖의 눈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다시 시작될 이야기가 눈꽃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