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어둠 속 한 줄기 빛, 혹은 더 깊은 늪

바람은 언제나 차가웠다. 시멘트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빌딩 숲을 휘돌아 들어오는 밤바람은, 마치 세상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여 얼려버릴 듯이 매서웠다. 윤슬은 낡은 방수포를 몸에 칭칭 감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기댄 것은 한때 책으로 가득했을 서가의 잔해였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인 공기는 폐부를 긁는 듯했지만, 적어도 여기는 안전했다. 외부와 연결된 모든 통로는 돌무더기와 폐자재로 막아두었으니까.

이런 은신처를 찾아내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하늘에서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리던 그날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다.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끔찍하게 변이된 괴물들이거나, 혹은 그 괴물들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이었다. 윤슬은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까지도. 그렇게 홀로 죽어가는 줄 알았다.

그때,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 카이였다.

숨을 들이쉬자 폐가 시큰거렸다. 이 산산조각 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위험하고 아름다운 존재. 윤슬은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간의 것과 닮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달랐다. 짐승의 날카로움과 신화 속 존재의 오묘함을 동시에 지닌 얼굴. 붉은 빛을 띠는 눈동자, 밤보다 깊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는 ‘괴물’이었다. 세상이 규정하는 ‘변이체’. ‘인류의 적’. 하지만 윤슬에게 그는 구원이었고, 저주였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다. 시간의 의미가 퇴색된 세상. 언제부터인지 모를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낸 지 사흘째였다. 카이는 언제나 윤슬에게 식량을 찾아왔다. 그의 뛰어난 감각과 괴물 같은 힘은 이 폐허 속에서 최고의 생존 도구였다. 동시에 그를 인간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낙인이었다.

“카이…….”

낮게 읊조린 이름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감이 심장을 갉아먹었다. 인간 사냥꾼들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흉측한 변이체들과 마주했을 수도 있다. 그의 강인함을 믿으면서도, 윤슬은 언제나 그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이 관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였다.

그때였다.
지잉―.
고요를 찢는 미세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윤슬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그 소리를 안다. 오래된 건물 틈새로,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존재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

쿵. 쿵. 쿵.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다. 그것은 분명 그의 발소리였다. 윤슬은 서둘러 낡은 담요를 걷어내고 통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틈새로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이!”

윤슬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인간보다 훨씬 큰 키, 이질적인 검은 피부, 그리고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핏자국. 그는 한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다쳤어?” 윤슬은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그에게 달려가 그의 굳건한 팔을 부축했다. 손에 닿는 그의 피부는 차가웠지만, 그 아래로 전해지는 근육의 단단함은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지치거나 흥분하면 본능적인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그의 다른 부분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척후대…….”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발견했어.”

윤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척후대. 인간 생존자 집단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집요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변이체를 사냥하고, 약탈하며 살아남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카이는 가장 값비싼 사냥감이었다. 그의 신체 일부는 값비싼 약재가 되거나, 혹은 그들만의 의식을 위한 제물이 될 터였다.

“어디서? 얼마나……?”

카이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강인했지만, 언제나 윤슬을 대할 때만은 조심스러웠다.

“이곳까지 추적하고 있어. 냄새를 맡았군. 멍청한 것들.”

카이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윤슬은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냥당하는 짐승의 눈빛이 아니었다. 언제든 되갚아줄 수 있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우리…… 움직여야 해.” 윤슬은 그의 어깨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살점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일반적인 무기로는 낼 수 없는 상처였다. “이 상처, 다른 변이체랑 싸웠나 봐. 척후대가 아니면…….”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도 한둘은 처리했다. 이곳으로 향하던 놈들을 내가 꼬리를 밟았어. 하지만 곧 본대가 올 거야.”

그는 들고 있던 낡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썩지 않은 통조림 몇 개와 건조된 육포, 그리고 낡은 담요 몇 장이 들어있었다. 그는 언제나 윤슬을 위해 최대한 안전한 물품을 구해왔다.

“이게 다야?” 윤슬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섞였다. 겨우 이것만 가지고 또다시 떠돌아야 하는가. 끝없는 도주. 끝나지 않는 삶.

카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윤슬의 몸을 감쌌다. 그의 품속은 언제나 차가웠지만, 윤슬은 그 안에서 유일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에게서는 흙냄새와 피 냄새,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뒤섞인 듯한 복잡한 향이 났다. 하지만 윤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카이’의 냄새였다. 그녀의 세상 전부를 의미하는 냄새.

“미안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윤슬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더 좋은 것을 가져오지 못해서.”

“아니야, 카이.” 윤슬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녀의 말에 카이는 잠시 몸을 굳혔다. 그는 윤슬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늘 어색해하면서도, 그것을 갈구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윤슬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만큼은 그에게도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상처는 괜찮아?” 윤슬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금방 아물 거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몸은 일반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상처 회복 속도도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다른 의미에서 카이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윤슬은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끊임없이 ‘변이’하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흉측한 모습일지라도, 그 안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잃어가는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윤슬은 그의 옷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대충 지혈했다. 그가 가져온 물건 중에 소독약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사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윤슬은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해?”

카이는 천천히 윤슬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항상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이 큰 손으로 한 번만 힘을 주면, 윤슬의 목숨은 쉽게 끊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윤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윤슬을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

“더 깊은 곳으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윤슬은 그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혼자라면 그는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그는 늘 망설이고, 인간 사회의 위협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나는…… 짐이 될 뿐이잖아.” 윤슬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카이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어떤 명령보다도 강렬했다. “너는 내 세상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고백에 윤슬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는 그녀의 전부였다. 동시에 그녀를 영원히 옭아맬 족쇄이기도 했다. 이 사랑은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금지된 것이었고, 발각되는 순간 그들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지옥의 문이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밖에서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낡은 건물의 잔해 위를 밟는 듯한 발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인간 사냥꾼들의 척후견이었다.

카이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눈은 다시금 냉혹한 포식자의 빛을 띠었다.

“놈들이 왔군.” 그의 입술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윤슬을 뒤로 밀치고는 몸을 앞으로 내세웠다. “서둘러. 숨어.”

“안 돼! 같이 가야 해!” 윤슬은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어깨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놈들은 나를 노린다. 시간을 벌어줄 테니, 먼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라.” 카이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내면에 숨겨진 ‘다른 것’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의 팔에 힘줄이 솟아오르고, 손톱이 미세하게 길어지는 것을 윤슬은 보았다.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윤슬은 필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가 혼자 척후대와 맞선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에게 죽음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그 안의 짐승이 깨어나, 인간 사냥꾼들을 끔찍하게 도륙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윤슬은, 그 이후 그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낡은 통로 너머에서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뒤이어 귀를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파창!
총알이 서가의 잔해를 때리고 튀었다.

“찾았다, 이 괴물 새끼!”
“여자도 있어! 변이체랑 같이 사는 미친년인가!”

인간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었다.
카이는 윤슬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 자기 뒤로 밀쳐냈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윤슬.”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눈 감아.”

윤슬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그의 지시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그 안에 숨겨진 괴물을 기꺼이 풀어낼 것이다.

총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에서.
윤슬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는 대신, 굳건히 카이의 옆에 섰다.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도망가지 않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지옥이든 상관없어.”

카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안에서 격렬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이 윤슬에게도 느껴졌다. 이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둘이 함께 죽거나, 혹은 둘이 함께 살아남거나.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어둠 속에서, 척후대원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낡은 복도 끝에서, 강렬한 손전등 불빛이 번쩍이며 그들을 비췄다.

그리고 윤슬은 카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 순간, 밖에서 들려오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침묵.
섬뜩할 만큼 고요한 침묵이 폐허를 감쌌다.

카이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윤슬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무슨……” 윤슬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굉음이 터졌다.

쾅!

그것은 총성도 아니었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땅이 흔들리고, 서가의 잔해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진이었다.
아니, 지진과는 달랐다.
땅 밑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거대한 무언가의 포효 같은 진동.

“……지진이 아니야.” 카이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붉은 눈이 더욱 깊은 어둠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굉음은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건,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었다.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거대한 혼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윤슬은 카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차가운 피부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밖에서, 인간 사냥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비명은, 점점 더 끔찍한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들의 은신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척후대보다, 변이체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재앙의 그림자였다.

윤슬은 눈을 떴다. 카이의 붉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서 유일한 안식을 찾았다.
이 금지된 사랑이 과연 이 거대한 재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마저도 이 새로운 지옥의 먹이가 될까.
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은신처 입구를 덮쳤다.
그림자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것은 카이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포식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포식자의 눈은, 윤슬을 향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징조가, 마침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