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새벽녘의 은밀한 주문

최아영은 오늘도 새벽녘 카페 문을 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햇살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골목 어귀에 자리한 작은 카페는 아영의 삶처럼 고단하고, 때로는 쓸쓸했다. 뜨거운 물을 내리고 원두 갈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영에게는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 철커덕 문 열리는 소리에 아영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영 씨, 오늘도 기분 여간 꿀꿀하신 게 아니시네요?”

단골손님 1호, 김 순경이었다. 김 순경은 항상 순찰 도중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이켰는데, 그의 넉살 좋은 웃음은 아영의 찌푸린 미간을 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꿀꿀해서 꿀꿀인가요, 순경님. 이 가게 월세만큼 꿀꿀한 건 없어요.”

아영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에스프레소 잔을 돌렸다. 김 순경은 허허 웃으며 지갑을 뒤적였다.

“그래도 아영 씨 커피만큼은 이 동네에서 제일이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여기 주변에 좀 이상한 소문이 돌아요.”

“이상한 소문이요? 우리 가게에 유령이라도 나온대요?” 아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니요, 그게… 갑자기 물건이 사라졌다가 제자리에 돌아오고, 뜬금없이 공중에 둥둥 뜨거나, 심지어는 이 골목에 핀 잡초들이 하루아침에 넝쿨째 황금색으로 변했다는 말도 있고요. 뭐, 다들 헛것을 본 거겠지만요.”

김 순경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돈을 내밀었다. 아영은 잔돈을 거슬러 주며 피식 웃었다. “순경님, 그건 제가 아니라 마술사가 와야 하는 사건인데요?”

“하하, 뭐 그렇긴 하네요.”

김 순경이 나간 후에도 아영은 괜히 두리번거렸다. 잡초가 황금색으로 변한다니. 이 동네에 마술사라도 이사 왔나.

그날 오후였다. 손님이 뜸해 한가로이 책을 읽던 아영의 눈앞에서,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설탕통이 공중으로 두어 바퀴를 돌더니 제자리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영은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설탕통? 너 지금 뭘 한 거니?”

아영은 눈을 비볐다. 분명 잘못 본 것이리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문이 열리며 햇살을 등진 한 남자가 들어섰다. 훤칠한 키,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인 외모. 그의 눈빛은 묘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 아주 신비로운 향이 나네요.”

남자는 싱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아영은 순간 넋을 잃을 뻔했다.

“무슨… 향이요?”

“음, 그러니까… 새벽 이슬 맺힌 풀잎의 향, 그리고 갓 볶은 영혼의 향, 아, 아니! 갓 볶은 원두의 향이요!”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영은 그가 몹시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아까의 설탕통만큼이나 묘한 끌림을 느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아영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저는… 이 가게에서 가장 신기한 음료를 맛보고 싶습니다.”

“신기한 음료라뇨? 메뉴판에 있는 것 외엔 없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지닌 보물 하나와 교환할 만한 음료는 없나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보석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주운 돌멩이 같기도 한 그것은 미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손님, 저희는 현금이나 카드로만 계산받습니다.”

남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깨달은 듯 미소 지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황금빛 엽전 몇 개를 꺼내 아영의 앞에 놓았다. 엽전은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분명 평범한 돈은 아니었다.

아영은 황당했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손님, 이런 돈은… 제가 받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아주 귀한 것이니,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겁니다.” 남자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용이 안 된다고요. 어디서 오셨어요, 혹시? 촬영 중이신가요?”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촬영? 아, 이 세계의 새로운 놀이인가요? 저는… 음, 멀리서 왔습니다. 아주, 아주 멀리서요.”

그의 정체는 도깨비, 강준이었다. 인간 세상에 처음 내려온 초보 도깨비. 그는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아영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이끌려 온 것이었다. 그 향기는 그의 본능을 자극하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강준은 새벽녘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아니, 단골을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 그는 매일같이 카페에 나타나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엽전 대신 현대 화폐를 건네는 법을 어설프게 익혔다. 그의 존재는 아영의 평범한 일상을 매일매일 뒤흔들었다.

“아영 씨, 저 인간들 사이에 유행하는 ‘셀카’라는 것을 한번 찍어보고 싶습니다.”

“셀카요? 휴대폰 있으세요?”

“물론이죠!” 강준은 자랑스럽게 나뭇잎 하나를 꺼냈다. 나뭇잎은 순식간에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변했다. 아영은 기겁했다.

“뭐… 뭐예요, 그거?”

강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제 기술입니다. 아직 미숙해서 가끔 오류가 나지만요.”

아영은 직감했다. 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의심은 강준의 실수로 종종 확신이 되었다. 그가 깜빡하고 사라진 컵을 공중에 띄우거나, 주문받은 아메리카노를 뜬금없이 황금빛 커피콩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었다. 아영은 이제 놀라는 것을 넘어 체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준 씨, 제발… 평범하게 있어주세요. 여기 CCTV 있어요.”

“CCTV? 아, 영혼을 담는 거울이군요? 재미있네요.” 강준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천장의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아영은 두통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준의 엉뚱함과 순수함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그는 아영이 힘들 때면 조용히 나타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거나, 가게가 바쁠 때는 눈치 없이(?) 온갖 것을 공중에 띄우며 일을 돕기도 했다. 물론 그의 ‘도움’은 종종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어느 날, 카페의 오래된 에어컨이 고장 났다. 찜통더위에 손님들은 발길을 돌렸다. 아영은 좌절했다. 수리비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영 씨, 왜 그리 시무룩해 계십니까?” 강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에어컨이 고장 났어요. 이번 달 월세도 빠듯한데, 수리비는 어떻게 마련하죠?”

강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빙긋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강준 씨가요? 뭘 어떻게 고쳐요? 더 망가뜨리지나 마세요.” 아영은 믿지 않았다.

강준은 에어컨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에어컨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아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한 거예요?”

“음, 그냥… 제가 가진 약간의 기술로… 먼지를 털어낸 것뿐입니다.” 강준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날 저녁, 가게 문을 닫고 함께 커피를 마시던 아영은 조용히 강준에게 물었다.

“강준 씨… 혹시, 도깨비예요?”

강준의 얼굴에서 피식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도깨비입니다. 인간 세상에 처음 내려온, 미숙한 도깨비.”

아영은 놀라기보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그동안의 모든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그렇게 엉뚱할 리가 없죠.” 아영은 픽 웃었다.

강준은 아영의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할 줄 알았는데.”

“놀라긴 했죠. 그런데 무서워할 정도는 아니에요. 좀 귀찮을 뿐이지.” 아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당신이 그동안 우리 가게 주변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들의 범인이라는 거네요?”

강준은 겸연쩍게 웃었다. “음… 제 능력이 아직 서툴러서, 의도치 않게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에어컨도 고쳐줬잖아요.” 아영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 그들의 관계는 한층 더 깊어졌다. 아영은 강준의 도깨비 능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강준은 아영을 통해 인간 세상을 배워갔다. 그는 카페에서 아영을 돕고, 가끔은 몰래 마법을 부려 손님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무표정하게 라떼를 마시던 손님의 컵에서 갑자기 하트 모양의 거품이 솟아오르거나, 계산대 위의 동전이 잠시 동안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식이었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도깨비와 인간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다. 강준은 도깨비 세계에서 내려온 ‘칙사’라는 존재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어느 날, 평소 강준과는 비교도 안 되게 위압적인 aura를 풍기는 남자가 카페에 나타났다. 그는 강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준, 자네 이럴 작정인가? 인간과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다! 더구나 감정이라니, 말도 안 돼!”

강준은 아영을 등 뒤로 숨기며 맞섰다. “칙사님, 저는 아영 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진심? 겨우 몇 년 살다 죽을 인간에게? 자네가 도깨비로서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릴 셈인가?” 칙사는 비웃었다.

아영은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보다, 강준을 향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먼저였다. 자신 때문에 그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날 밤, 아영은 강준에게 말했다. “강준 씨… 우리, 이젠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강준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아영 씨…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도깨비고, 저는 인간이잖아요.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당신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도 싫고요.” 아영의 목소리는 떨렸다.

강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영 씨 없이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어설프게 마법을 부릴 때마다, 아영 씨가 웃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낙입니다.”

“강준 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영 씨. 제가 방법을 찾겠습니다. 우리 함께할 방법을요.”

강준은 그날 이후 한동안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영은 빈 강준의 자리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의 엉뚱한 행동과 황당한 마법이 그리웠다.

며칠 뒤, 카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강준이 활짝 웃으며 들어섰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아영 씨! 제가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무슨 해결책을요?” 아영은 불안하게 물었다.

“인간 세상에서 도깨비가 평범하게 사는 방법이요!” 강준은 눈을 반짝였다. “제가 인간 세상을 배우고, 인간의 규칙을 따르면서… 아영 씨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영은 그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그게… 해결책이라고요?”

“네! 물론, 가끔 마법을 엉뚱하게 쓸 수도 있고, 칙사님이 저를 찾아와 꾸짖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아영 씨와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는 보따리에서 알록달록한 앞치마와 머리띠를 꺼냈다. “그리고, 저는 아영 씨의 카페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할 겁니다! 월급은 제가 만든 황금빛 커피콩으로 주셔도 됩니다!”

아영은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예측 불가능한 도깨비였다. 하지만 그 예측 불가능함이 그녀의 삶에 색다른 활력을 불어넣었다.

“황금빛 커피콩은 안 받아요. 그 대신… 매일 저 웃게 해줄 자신 있어요?”

강준은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그럼요! 아영 씨가 웃는다면, 저는 이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영은 그의 과장된 말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도깨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강준은 곧바로 앞치마를 둘러메고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손에서 엉뚱한 마법이 튀어나오곤 했다. 우유 거품을 만들다가 갑자기 하트 모양의 구름을 만들어내거나, 커피 머신을 고치려다 황금빛 증기를 뿜게 하는 식이었다. 아영은 이제 그런 강준의 실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김 순경은 어느 날, 카페에서 일하는 강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영 씨, 저 잘생긴 청년은 누구예요? 새로 알바생이라도 고용했어요? 그런데… 왠지 좀 낯설지가 않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영은 김 순경에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빙긋 웃었다.

“글쎄요. 어쩌면… 당신이 찾던 그 마술사일지도 모르죠.”

강준은 김 순경에게 꾸벅 인사하며 컵에 하트 모양 라떼 아트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김 순경은 눈을 비볐다. 분명 라떼 아트는 평범한 하트였는데, 왠지 모르게 하트가 방금 막 뿅 하고 솟아오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쩌면 아영의 새벽녘 카페는 이제 정말로 ‘새벽녘’이 된 것 같았다. 고단하고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강준이라는 신비롭고 엉뚱한 빛과 함께, 그녀의 삶에도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그 어떤 규칙도 그들의 웃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영은 확신했다. 강준 덕분에, 그녀의 삶은 앞으로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