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골의 아침은 언제나 고즈넉한 선율로 시작되었다. 키 큰 소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쏴아 하는 소리, 맑은 샘물에서 갓 떠온 물을 끓이는 아궁이의 나지막한 불꽃 소리, 그리고 갓 구운 보리빵 냄새가 섞여 공기를 채웠다. 아렌은 낡은 나무 물통을 어깨에 메고 샘물로 향했다. 새벽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숲길은 촉촉한 흙내음을 풍겼다. 그는 숲속 깊숙이 자리한, 이 마을의 생명줄과도 같은 샘물가에 도착했다. 물은 투명했고, 바닥의 자갈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비쳤다.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자, 어제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아렌, 일찍도 나왔구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할머니였다. 늘 정갈한 흰색 옷을 입고, 등에는 약초 바구니를 멘 채였다. 얼굴의 잔주름은 지난 세월의 흔적이었지만, 눈빛만은 샘물처럼 맑고 깊었다.
“할머니도요. 벌써 약초 캐러 가세요?”
“그럼. 이른 아침 이슬 먹은 약초가 약효가 제일 좋지. 넌 왠지 오늘따라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구나.”
마리 할머니는 아렌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길은 언제나 따뜻했다.
“아뇨, 그냥… 요즘따라 잠이 잘 안 와서요.” 아렌은 애써 미소 지었다.
“세상이 시끄러우니 잠이 오겠니. 하지만 아렌,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네 마음의 고요한 샘물을 잃지 말아야 한단다.”
할머니는 짧은 조언을 남기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렌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고요한 샘물… 나도 할머니처럼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오후가 되자, 마을의 평화는 깨졌다. 제국에서 파견된 세금 징수원들이 마을 어귀에 나타난 것이다. 덩치 큰 병사들을 앞세운 그들의 얼굴에는 늘 냉소와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오늘은 특히 더했다.
“솔바람골 주민들은 들으시오! 제국의 새로운 칙령에 따라, 이번 달부터 ‘황금빛 꿀’의 공납량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밀 수확량의 절반은 즉시 제국에 바쳐야 할 것이오!”
징수원의 목소리가 확성기에 대고 외치듯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솔바람골은 꿀과 밀이 주 생산물이었다. 그것들의 절반을 바치고, 꿀은 두 배로? 남은 것으로는 겨울을 나기도 힘들 것이다.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징수관 나리! 작년 흉작으로 다들 힘듭니다! 어떻게 절반이나 가져가십니까?”
징수관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너희 사정이고. 칙령은 칙령이다! 불복종은 곧 반역이다!”
병사들이 창을 들어 위협하자, 노인은 흠칫 물러났다. 아렌은 이를 악물었다. ‘저들이 너무한다…’
징수원들이 마을 회관에 자리를 잡고 공물을 걷기 시작했다. 칸은 옆에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젠장! 저 더러운 놈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다 굶어 죽는다고!”
아렌은 칸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해, 칸. 여기서 소란 피워봤자 좋을 것 없어.”
“그럼 뭘 어쩌라는 거야?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데?!” 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리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는 작은 천 조각에 약초를 싸는 중이었다. “칸 말이 맞아. 이제 우리 힘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겨울이 오면 더 힘들 거고.”
리나는 늘 침착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아렌은 예전 마리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옛날에는 이 솔바람골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땅이었다고… 제국이 들어서기 전에는.’
해가 저물 무렵, 징수원들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리나의 작은 약초 상점이었다. 리나의 어머니는 병이 깊어 늘 귀한 약초로 연명하고 있었다. 징수관은 상점 구석에 놓인, 리나 어머니가 아끼던 오래된 장신구 함을 발견했다.
“이것은 또 뭐냐? 숨겨둔 재산인가? 제국에 바쳐야 할 공물인데!”
“안 돼요! 그건 어머니 유일한 유품이에요!” 리나가 절규했다.
하지만 징수관은 리나를 밀쳐내고 함을 빼앗았다. 병사들이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리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 순간, 아렌의 눈앞이 붉어졌다. ‘이건 아니야. 이건 너무하잖아.’ 그의 마음속 고요한 샘물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아렌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
징수관이 비웃듯 아렌을 돌아보았다. “꼬맹이가 겁도 없이! 너도 반역에 동참하려는 것이냐?”
칸이 아렌의 옆에 섰다. 그의 손에는 낡은 곡괭이가 들려 있었다. “반역이든 뭐든, 이건 못 봐준다.”
리나 역시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우리 어머니 물건은 건드리지 마세요!”
징수관과 병사들은 셋의 기세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비웃었다. “고작 너희 셋이 뭘 할 수 있다고?”
어둠이 내린 마을, 세금 징수원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상처는 선명했다. 아렌, 칸, 리나는 마을 외곽의 낡은 창고에 모여 앉았다. 달빛이 듬성듬성 새어 들어왔다.
“결국 아무것도 못 했어.” 칸이 허탈하게 말했다.
리나는 품에서 작은 목각 인형을 꺼냈다. “어머니가 늘 소중히 여기던 인형인데… 다행히 이것만은 못 가져갔어.”
아렌은 조용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다. ‘고작 셋이라고? 아니, 어쩌면 시작일지도 몰라.’
그는 문득 마리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네 마음의 고요한 샘물을 잃지 말아야 한단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샘물은 고요함 대신, 뜨거운 불씨를 품고 있었다.
“우리,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는 없어.” 아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칸과 리나가 아렌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도 희망과 결의가 엿보였다.
“그럼 뭘 할 건데?” 리나가 물었다.
아렌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 솔바람골의 모든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한다는 건 알겠어.”
세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고요했던 솔바람골의 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작은 불씨가 피어나, 거대한 제국의 어둠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