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5화

오래된 종이 위에 희미하게 찍힌 주소는 퇴락한 시간의 흔적처럼 흐릿했다. 지훈은 손바닥에 땀이 배도록 낡은 종이를 쥐고 있었다. 수현의 오래된 스케치북에서 발견된 단 하나의 단서. ‘청림동 작업실.’ 젊은 시절 수현이 가장 행복해했던 곳, 예술의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녀만의 비밀 장소였다.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청림동은 잊힌 옛 시절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고, 벽에는 빛바랜 벽화와 정체 모를 그래피티가 뒤섞여 있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물감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풍겨왔다. 이곳이야말로 수현이 꿈을 꾸고, 아픔을 위로받던 곳이었으리라. 지훈의 가슴이 먹먹하게 죄어왔다. 그녀의 자취를 쫓는 이 발걸음이 혹시나 그녀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낯선 풍경 속 익숙한 그림자

지훈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낡은 간판들이 제각기 다른 글씨체로 오랜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몇몇 작업실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지만, 대부분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속에서 수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캔버스 앞에 서 있었을까.

한참을 헤매던 지훈의 눈에 낡은 나무 간판이 들어왔다. ‘김아트 갤러리’. 간판의 글씨는 페인트가 벗겨져 희미했지만, 그 옆으로 그려진 추상화가 왠지 모르게 수현의 화풍과 닮아 있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여기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떨리는 손으로 녹슨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을 열자마자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갤러리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이젤과 그림들 사이에서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지훈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김선생님이십니까?”

“김아트 갤러리 주인이라면 나겠지. 무슨 일로 찾아왔나?”

노인은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수현의 낡은 사진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내밀었다. 20대 초반의 수현. 맑게 웃는 눈빛과 긴 머리, 옅은 미소가 담긴 사진이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윤수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노인의 시선이 사진에 닿는 순간, 그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갤러리 안의 모든 먼지 입자들이 그 침묵 속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수현이라… 이 얼굴…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노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렁였다. 아는 것이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주 방문했던 적이라도요.”

“음… ‘강수정’이라는 이름을 썼던 아가씨가 있었지. 머리가 길고 눈빛이 참 슬펐어. 그림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자네가 보여준 이 사진 속 아가씨와 많이 닮았네. 혹시 그 아가씨가 이름을 바꿨던가?”

두 번째 이름, 깊어진 수수께끼

강수정. 지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수현이 이름을 바꿨다고? 왜? 언제부터?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수정… 언제쯤 이곳에 계셨습니까?”

“벌써 10년도 넘었지. 당시엔 꽤나 유명한 화가 지망생이었어. 이곳에서 개인 작업실을 빌려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작업실 보증금도 안 찾아가고.”

김선생의 말을 듣는 내내 지훈의 얼굴은 굳어갔다. 수현이 사라진 시기와 일치했다. 그녀는 정말로 ‘윤수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강수정’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려 했던 것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 아가씨, 무슨 큰 상처가 있는 것 같았어. 항상 외로워 보였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았지. 한 번은 나한테 그러더군.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어요,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저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라고.”

노인의 회상 속에서 수현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지면서도 동시에 아련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훈이 아는 수현은 늘 밝고 긍정적인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모든 것을 잊고 싶을 정도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에 지훈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혹시… 그녀가 남긴 것이 있습니까? 그림이라도, 편지라도…”

김선생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갤러리 안쪽 구석으로 향했다. 먼지가 쌓인 천막을 걷어내자, 그 아래에서 작은 나무 조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형상이었다. 그 조각상의 표정은 슬픔과 희망이 뒤섞인 듯 미묘했다.

“이건… 그 아가씨가 이곳을 떠나기 며칠 전에 완성한 조각상일세.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었지. 며칠 뒤에 찾으러 오겠다고 했는데… 영영 오지 않았어. 버려두고 간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못 오는 사정이 있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지훈은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의 질감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현의 손길이 닿았던 작품. 이 조각상에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각상의 받침대 부분을 살펴보던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작은 홈이 파여 있었고, 그 안에 뭔가가 박혀 있었다.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자, 작게 접힌 종이 한 조각이 나왔다.

종이 조각을 펼치자, 수현의 필체로 쓰인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별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찾아줘.
남산 타워

별이 가리키는 곳으로

남산 타워. 그곳은 지훈과 수현이 학창 시절, 미래를 약속하며 자물쇠를 걸었던 추억의 장소였다. 별처럼 빛나는 꿈을 함께 꾸었던 곳. 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그곳을 언급했을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별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찾아줘.’ 마치 절박한 외침처럼 들렸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사진 속의 해맑은 수현, 강수정이라는 이름으로 살고자 했던 슬픈 수현, 그리고 조각상에 담긴 희망과 고통이 뒤섞인 수현. 그녀의 모습은 퍼즐 조각처럼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지만, 완성된 그림은 점점 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형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숨어버린 것 같았다.

“김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훈은 조각상을 소중히 품에 안고 갤러리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남산 타워는 서울의 스카이라인 위로 우뚝 솟아, 마치 지훈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 같았다.

수현은 그곳에 무엇을 남겼을까? 그녀의 흔적일까, 아니면 또 다른 수수께끼의 시작일까. 지훈은 조각상 속 여인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이 보고 싶던 별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희미한 희망이 솟아올랐다.

내일, 아니, 당장 오늘 밤이라도, 지훈은 남산으로 향할 것이었다. 그녀의 메시지가 가리키는 가장 높은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