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그림자처럼 짙게 내려앉은 비탈길. 류진은 낡은 망원경을 눈에 붙인 채, 아래로 펼쳐진 제국의 흑철 수송로를 응시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거친 풀잎을 흔들었고, 그의 뺨을 스치는 감각은 가상 현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했다. 『에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가상 세계이자, 이제는 가장 잔혹한 현실이 되어버린 곳.
“……젠장, 놈들의 배포가 갈수록 커지는군.”
류진의 낮은 중얼거림에 등 뒤에 숨어있던 세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든 휘두를 준비가 된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번엔 강화 병력까지 붙었어. 최소한 한 부대 이상이야, 류진.”
세라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수송대가 아니었다. 묵직한 마갑으로 무장한 제국 기사들이 선두에 섰고, 그 뒤를 잇는 거대한 수송 마차들은 제국의 상징인 두 마리 용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마차 사이사이에는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이동식 포대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자원 수송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약탈해 가는 건, ‘새벽의 광산’에서 캐낸 마력석 결정화물이 확실해.”
류진이 망원경을 내리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새벽의 광산. 한때 평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 제국이 마력석을 발견하고 무자비하게 빼앗아 간 후, 그곳의 광부들은 노예처럼 부려지다 대부분 죽어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제국의 눈을 피해 그림자처럼 숨어 살아야 했다.
“젠장,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을까.”
세라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주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세라의 가족 또한 제국의 폭정에 희생되었다. 이 『에덴』이라는 게임 속에서 그들은, 단순한 게임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아픔을 투영하는 존재들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 없어. 카론, 준비됐나?”
류진의 시선이 옆 언덕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거구의 사내에게 향했다. 거대한 양손 도끼를 짊어진 카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돌처럼 무표정했지만, 그 단단한 어깨에는 류진이 알지 못할 무게가 얹혀 있는 듯했다. 한때 제국 병사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류진은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카론이 자신들과 함께, ‘들불’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국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좋아, 계획대로 진행한다. 세라, 넌 우측 능선을 따라 이동해. 중앙 수송 마차를 목표로 해. 마력석 결정화물이 들어있을 거다. 카론은 좌측 숲에 매복. 놈들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바로 돌입.”
류진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대강의 지형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그의 손놀림은 거칠었지만 정확했다. 그는 화려한 마법사도, 압도적인 전사도 아니었다. 그의 강점은 바로 ‘지략’과 ‘기계공학’이었다. 평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허름한 무기들과 기발한 함정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였다.
“나는 중앙에서 시선을 끌 거야. 내 신호와 함께 돌입한다. 기억해, 우리는 들불이다. 작은 불씨가 모여 세상을 태울 수 있다는 것을 저놈들에게 보여주는 거야.”
세라와 카론은 류진의 눈빛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심장은 이미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이들은 『에덴』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태어나, 계급과 특권이 지배하는 제국의 억압 속에서 숨죽여 살던 평민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
시간이 흘러 한밤중, 흑철 수송대가 마침내 그들의 매복 지점에 도달했다. 묵직한 바퀴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고, 마차에 매달린 마법 등불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제국 기사들의 굳건한 행렬은 마치 거대한 강철 뱀처럼 보였다.
“이제군…….”
류진은 낮게 읊조리며 손에 쥔 ‘충격 진동탄’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가 직접 개량한 이 폭탄은 살상력보다는 충격파를 이용해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의 손목에 찬 작은 장치가 『시스템 메시지: 스킬 [정교한 폭파술 (하급)] 발동 준비 완료』라는 푸른색 글자를 띄웠다.
휘익-!
작은 폭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수송대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불꽃이 번쩍이며 땅에 닿는 순간,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진동이 지축을 흔들었다. 땅바닥이 부서지고 수송 마차가 휘청거렸다.
“크아악!”
“뭐, 뭐야?!”
제국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류진이 준비한 두 번째 함정이 작동했다. 수송로 옆에 매설해 둔 거대한 쇠사슬 함정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마차의 바퀴들을 옭아맸다. 끼이이익-! 굉음을 내며 마차들이 멈춰 섰고, 일부는 뒤집어지기까지 했다.
“지금이다! 돌격!”
류진의 우렁찬 외침이 밤하늘을 갈랐다.
촤르륵!
카론이 몸을 숨겼던 숲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가르고 제국 기사의 갑옷을 강타했다. 쨍그랑!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기사는 방패째로 날아가 버렸다. 카론의 일격은 파괴적이었다. 그는 단순히 힘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식 검술에 정통했던 그는 적의 약점을 정확히 노려 공격했다.
동시에 세라는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발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제국 병사들의 시야 밖에서 날렵하게 접근했다. 퓨슈슉! 그녀의 단검이 병사들의 목덜미와 팔목을 스치자, 그들의 방어력 스탯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이 류진의 『전술 안경』에 포착되었다.
『시스템 메시지: 적 병사 방어력 15% 감소!』
『시스템 메시지: 적 병사 ‘출혈’ 상태 이상 적용!』
“흩어져! 놈들을 포위해라!”
제국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그의 검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왔고, 주변의 병사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버프를 걸었다.
“젠장, 저놈부터 처리해야 해!”
류진은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기사단장이 살아있는 한, 병사들의 사기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류진은 품에서 마지막 남은 연막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혼란에 빠진 병사들 사이로 던졌다. 푸쉭-! 자욱한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고, 병사들은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했다.
“콜록, 콜록! 아무것도 안 보여!”
그 순간, 류진은 세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세라! 기사단장의 갑옷 틈새를 노려! 독침이다!”
세라는 연막 속에서 유령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서 섬광처럼 짧은 침 하나가 날아갔다. 파직! 기사단장의 목덜미와 갑옷 틈새 사이를 파고들었다.
“크윽! 뭐… 뭐야 이 기분 나쁜 감각은?!”
기사단장은 독침이 퍼지는 듯한 쑤시는 통증에 몸부림쳤다.
『시스템 메시지: 적 ‘기사단장 발로스’ 독 상태 이상 적용!』
『시스템 메시지: 체력 지속 감소! 스킬 사용 불가!』
독은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기사단장의 능력이 봉인되자,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꺾였다. 카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고, 세라는 잔여 병력을 빠르게 정리했다.
“마차! 마차를 열어!”
류진은 쓰러진 병사들의 시신을 넘어서 중앙 수송 마차로 달려갔다. 굳게 잠긴 마차의 문을 손에 든 도구로 빠르게 해제했다. 찰칵! 빗장이 풀리고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영롱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석 결정화물이었다. 그와 함께, 마차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수많은 평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이게 대체…….”
류진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단순히 마력석을 운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은 마력석과 함께, 새벽의 광산에서 붙잡은 평민들을 강제로 운반하고 있었다. 아마도 수도의 노예 시장으로 끌려가거나, 다른 광산으로 보내질 터였다.
“살아있는 자가 있었어! 우리가 구해야 해!”
세라가 외쳤다. 평민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이들을 올려다봤다. 자신들을 학대하던 제국 병사들과는 다른 모습에, 희미한 희망을 품는 듯했다.
“젠장, 예상치 못했던 변수군.”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원래 계획은 마력석만 파괴하거나 탈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카론! 후방을 막아! 세라, 이분들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도망쳐! 내가 이 마차들을 폭파시켜서 시간을 벌게!”
그들의 뒤에서 저 멀리, 제국군의 지원 병력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류진은 마차 안의 마력석 결정화물을 보며 빠르게 계산했다.
‘저 마력석들을 과부하시키면….’
그는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 마력석 결정화물 사이에 자신의 개조된 폭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손이 떨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정확했다.
『시스템 메시지: 스킬 [마력 증폭 폭탄 (중급)] 설치 완료!』
“빨리, 세라! 카론! 어서!”
류진은 소리쳤다. 세라가 겁에 질린 평민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론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마지막까지 추격하는 제국 병사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류진은 마차 밖으로 뛰쳐나와 폭탄의 스위치를 눌렀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푸른 마력석의 에너지가 폭탄과 만나 증폭되면서, 거대한 마차들은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났다. 폭발의 섬광이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류진은 폭발의 충격파에 몸을 날려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온몸이 아우성쳤지만, 그의 시야에는 『시스템 메시지: 메인 퀘스트 [들불의 첫 번째 봉화] 완료!』라는 푸른색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멀리서 세라와 카론이 평민들을 이끌고 무사히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거대한 화염이 휩싸인 수송로와, 혼란에 빠진 제국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류진은 부서진 『전술 안경』을 벗어 던졌다. 얼굴에는 흙먼지와 땀방울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의 낮은 중얼거림은 밤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제국의 심장부에 작은 불씨 하나가 던져졌다. 그리고 이 불씨는, 언젠가 거대한 들불이 되어 제국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류진은,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들불의 동지들은, 그것을 맹세했다.
『시스템 메시지: 숨겨진 업적 [폭압에 맞선 첫 번째 봉화] 달성!』
『칭호 [들불의 선봉장] 획득!』
류진은 새로운 칭호를 확인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이 거대한 제국에 균열을 내고, 끝내 무너뜨릴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