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아르카나’의 밤하늘 아래, 아스테리아 마법학원의 첨탑은 별빛을 머금고 우뚝 솟아 있었다. 이 게임 속에서 아스테리아는 마법사들의 꿈이자 정점이었다. 하지만 류한에게 그 화려한 명성은 늘 희미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남들처럼 화려한 공격 마법이나 방어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대신, 그의 스킬 창에는 ‘마나 간파(Mana Discernment)’, ‘정기 분석(Essence Analysis)’, ‘환영 해체(Illusion Dispel)’ 같은 비주류 스킬들이 자리했다. 타인의 눈에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비효율적인 능력들이었지만, 류한은 그 덕분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고대 마법학 강의가 끝나고, 류한은 습관처럼 학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1마나 저장고로 향했다. 매일 저녁 이곳의 마나 흐름을 확인하는 것은 그만의 의식이었다. 저장고 내부는 늘 안정적이고 균일한 마나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그 마나가 학원 전체의 시설과 마법진을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었으니까.
“으음… 이상하네.”
마나 간파 스킬을 활성화하자, 류한의 시야에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마나 입자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늘 보던 흐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안정적인 흐름 아래, 아주 미세한 불협화음이 감지되었다. 마치 조용한 호수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가 끊임없이 굴러가는 듯한, 불규칙하고 둔탁한 진동. 그것은 마나 흐름의 ‘결’을 거스르는 이질적인 파동이었다.
[ *시스템: 미확인 마나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마나 간파’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0.01%)* ]
류한은 시스템 메시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 이질적인 진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장고의 바닥, 그 아래…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학원의 공식적인 설계도에는 제1마나 저장고 아래로는 그저 단단한 지반뿐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류한의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저장고를 나와 가장 깊은 지하 복도로 향했다. 학원생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낡고 먼지 쌓인 구역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들을 지나, 녹슨 철창으로 막힌 통로에 다다랐다. 먼지투성이의 벽에는 희미하게 고대 마법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문양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류한의 눈에, 다른 문양들과는 확연히 다른, 지워진 흔적의 일부가 포착되었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애써 지운 듯한, 하지만 완전하게 지워지지는 않은 기묘한 형상. 그는 ‘정기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주변의 마나와는 확연히 다른, 음습하고 끈적이는 기운이 그 형상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류한은 망설임 없이 벽에 손을 댔다. 스킬 ‘환영 해체’를 발동하자, 그의 손이 벽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의 견고한 돌벽은 옅은 안개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서서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어둠만이 남아있었다.
“이게… 지하에 숨겨진 문이었나.”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복도에는 희미한 마법등조차 없었다. 류한은 오른손에 작은 마나 구슬을 띄워 주변을 밝혔다. 불빛에 드러난 것은 비좁고 거친 흙벽의 통로였다. 학원의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땅속을 파고 들어간 동굴 같았다.
통로를 따라 내려갈수록 불쾌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마나 간파로 본 마나 입자들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어딘가에 이끌리듯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이, 아래로…
얼마나 내려갔을까. 통로는 갑자기 넓어지며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류한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의 마나 구슬이 비추는 곳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지하 공간의 중앙에는 마치 심장이 뛰는 듯이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거대한 검은색 수정이 박혀 있었다. 그 수정은 쇠사슬처럼 보이는 굵은 마나 도관들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 도관들은 공간의 벽면에 빼곡히 새겨진 복잡한 마법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둡고 탁한 마나 파동이 류한의 마나 간파 스킬을 뚫고 들어와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순수한 마나도, 정기도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절규가 농축된 듯한, 역겹고 절망적인 기운이었다.
[ *시스템: 고대 금단의 마나 기원체 ‘암흑 핵(Dark Core)’이 감지되었습니다. 극심한 정신 오염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
‘암흑 핵?’ 류한은 눈을 비볐다. 검은 수정 주변의 벽면에는 고대어로 쓰인 문자들이 가득했다. 그는 어설픈 고대어 지식을 총동원해 문장들을 해독하려 했다. 조각난 문장들 사이에서 섬뜩한 진실이 드러났다.
* “별들의 마법, 그 근원은 어둠에 잠겨… ”
* “절대자 아르카나의 영혼을 묶어두는 족쇄… ”
*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봉인은 지속될 수 없다… ”
* “마나의 헌납, 삶의 정수를 바쳐… ”
류한의 시선은 다시 마나 도관들로 향했다. 그 도관들은 암흑 핵에서 뻗어 나와 벽면을 타고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학원 위로 뻗어 나가는 다른 마나 통로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학원의 제1마나 저장고, 그리고 학원 전체의 마나 순환 시스템과…
“설마… 아니, 그럴 리가… ”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한기. 류한은 깨달았다. 아스테리아 마법학원은 단순히 이 거대한 지하 공간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학원은, 이 암흑 핵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봉인하고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였다. 그리고 그 봉인을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마나와 ‘삶의 정수’는… 바로 학원생들과 교수진에게서, 그들의 마법 수련과 일상적인 마나 사용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수확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트 마법학원 아스테리아는, 거대한 마나 농장이자 생명력 착취 기관이었던 것이다.
어두운 수정, 암흑 핵이 다시 한번 섬뜩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류한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촉수 같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그의 정신 속으로 직접적으로 울려 퍼지는, 끔찍한 갈망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 더… 더 많은 마나를… 삶의 정수를… 자유를…
그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고대어로 ‘절대자 아르카나의 영혼’이라 불리는, 세상의 근원을 뒤흔들 힘을 가진 존재가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스테리아 마법학원은 그 존재를 억누르기 위해, 매일 수많은 마법사들의 꿈과 노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류한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평범한 학원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학원 전체가, 심지어 이 게임의 세계관 자체가 거대한 금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순간, 암흑 핵에서 뿜어져 나오던 진동이 급격히 강해졌다. 마나 도관들이 팽팽하게 울렸고, 벽면의 고대 마법진들이 섬뜩한 붉은빛을 발했다. 봉인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류한의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학원 지하 깊숙한 곳까지 무슨 일이지?”
낮고 차분한 목소리. 류한은 얼어붙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학원의 최고 책임자 중 한 명인 아벨 마법 교수였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자애로운 미소 대신, 싸늘하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마법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그 끝에서는 억누르기 힘든 강대한 마나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류한은 직감했다. 이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이 학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의 등 뒤의 암흑 핵은 광기 어린 진동을 뿜어내고 있었고, 눈앞의 아벨 교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류한은 지금, 아스테리아 마법학원의 가장 끔찍한 금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기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