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6화

깨어나는 그림자

지아는 윤서의 방 문턱에 서서 숨을 죽였다. 며칠 전만 해도 활기 넘치던 윤서의 오피스텔은 이제 곰팡내와 묵은 먼지로 가득했다. 창문은 굳게 닫혀 밖의 햇살 한 조각도 허락하지 않았고, 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마른 빵 조각과 반쯤 비워진 물컵이 놓여 있었다. 윤서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곳의 어떠한 사물도 붙잡고 있지 않았다.

“윤서야…”

지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흔들렸다. 윤서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지아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지아는 윤서가 지금 어떤 꿈속에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윤서는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먼저 떠난 동생과의 마지막 행복했던 순간을 꿈으로 사갔었다. 파랑새가 날아다니던 들판, 따스한 햇살 아래 웃음 짓던 동생의 얼굴, 그리고 자신을 부르던 그 맑은 목소리. 그 꿈은 윤서에게 지옥 같던 현실의 무게를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안식처가 그녀의 현실을 잠식하고 있었다.

윤서의 뺨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고,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며칠을 씻지 못한 듯 머리카락은 엉켜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묘한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 평온함이 지아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잊은 자의 평화가 아니라,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도피한 자의 덧없는 평온함이었다.

잃어버린 윤곽

지아는 천천히 윤서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꿈을 파는 상점을 윤서에게 소개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윤서의 절망을 달래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순수했던’ 마음이 이제는 윤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윤서야, 내 말 들려? 너 지금… 너는 여기 있어. 이 방에…”

지아는 윤서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윤서의 몸이 흔들렸지만, 시선은 여전히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입술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지아는 귀를 기울였다.

“언니… 저기… 파랑새 보여? 정말 예쁘지?”

윤서의 목소리는 너무나 희미해서 듣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순진무구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어린 시절 동생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지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윤서는 지금 동생과 함께, 그 푸른 들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지아는 윤서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대로 두면 윤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현실에서 지워질 터였다. 꿈속에서 영원히 살다가, 육신은 그저 껍데기로 남아 스러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비극을 막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꿈의 무게

지아는 윤서를 잠시 혼자 둔 채, 다시 꿈을 파는 상점으로 향했다. 해 질 녘 상점은 언제나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진열대 위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꿈들이 진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아의 눈에는 그 반짝임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을 유혹하는 덫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점 안의 고요함이 지아를 감쌌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지만, 예전처럼 포근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상점 주인 할머니가 카운터 뒤에서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늘 깊고 어딘가 아련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림자를 드리운 듯했다.

“또 오셨군요, 아가씨. 오늘은 어떤 꿈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할머니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지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윤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울먹이며 물었다.

“할머니, 윤서… 윤서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너무 깊이 꿈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해요? 꿈을 되돌릴 수는 없나요?”

할머니는 천천히 안경을 고쳐 썼다.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지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꿈은 한 번 씨앗을 뿌리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법이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씨앗이라도, 가꾸지 않으면 잡초처럼 무성해지거나, 독초가 될 수도 있답니다. 일단 심어진 꿈을 뽑아내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통스러워도 좋아요! 윤서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죽어가고 있어요, 할머니! 현실을 외면하고 영원히 꿈속에서 살 순 없어요.”

지아의 절규에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꿉니다. 어떤 꿈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어떤 꿈은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지요. 하지만 꿈을 사는 행위는, 잠시 위안을 얻는 것이지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서 아가씨는… 그 꿈을 현실과 착각해버린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제가… 제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데…”

지아는 고개를 숙였다. 죄책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왔다.

“아니오, 아가씨.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방법이… 가혹할 뿐이지요. 한 사람이 완벽한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그 꿈만큼이나 강렬한 현실의 감각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달콤한 꿈을 깨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 강한 쓴맛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 쓴맛이… 잊었던 고통일 수도 있고, 상실일 수도 있고, 혹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의 말은 지아의 마음에 서늘한 칼날처럼 박혔다. 잊었던 고통, 상실, 진실. 윤서가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것들. 그것을 그녀에게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니. 지아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윤서를 구해야 해요. 그녀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요.”

“아가씨의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어쩌면 아가씨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음을 명심하세요. 꿈을 파는 상점은, 그저 꿈을 보여줄 뿐, 그 꿈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오롯이 인간의 몫이랍니다.”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슬픔과 연민, 그리고 어떤 체념 같은 것이 엿보였다. 마치 자신 또한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한 것처럼.

메아리치는 현실

다시 윤서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지아의 손에는 할머니가 건네준 작은 유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투명했지만, 할머니는 ‘현실의 가장 강렬한 메아리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것을 쥐고 있었다.

윤서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가끔씩 미소를 띠었고, 눈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있었다. 지아는 윤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고, 입을 열었다.

“윤서야. 네 동생… 네 동생이 죽었잖아.”

말을 내뱉는 순간, 지아의 목소리는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윤서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사라졌다.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더 강한 쓴맛’.

“기억나지? 그날… 비가 엄청 왔었어. 너는 우산을 가지고 왔었어. 하지만 동생은… 너를 기다리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네가 우산을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윤서의 얼굴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미세한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아는 그 끔찍한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를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네가 늦게 도착해서… 동생은 혼자였어. 네가 눈을 감았을 때 보던 파랑새가 날던 들판은… 네 죄책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야. 동생은… 이미 없어. 네 곁에 없어!”

지아는 거의 울부짖듯이 말했다. 유리병 속의 투명한 액체가 마치 그녀의 고통처럼 미세하게 파동치는 것 같았다. 윤서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창백했던 뺨에 핏기가 돌았다. 꿈의 완벽한 표면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균열의 순간

갑자기 윤서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냈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든 유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액체가 스르륵 김처럼 피어올라 윤서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윤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닌, 지아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아니야… 아니야… 동생은… 동생은 거기 있었어… 파랑새… 파랑새와 함께…”

윤서는 현실을 부정하듯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녀의 뇌리에는 지아가 던진 잔인한 진실이 칼날처럼 박혔다. 꿈의 아름다운 허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제 더 이상 맑은 행복이 아닌, 깊은 혼란과 고통이 읽혔다.

지아는 윤서의 손을 잡았다. 아까처럼 얼음장 같지 않았다. 미약하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윤서는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지아는 더욱 꽉 잡았다. 윤서의 몸이 크게 한번 휘청였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사람처럼.

“윤서야… 돌아와. 동생은 이제 없지만, 너는 여기 있잖아. 나도 여기 있고. 너는 살아야 해. 이 현실에서… 네가 만들어갈 미래가 아직 남아있잖아.”

지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윤서를 끌어안았다. 윤서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비로소 그녀가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윤서는 한참을 발버둥 치며 울부짖다가, 이내 지아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픔이 섞인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꿈속의 평온함이 깨진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현실의 고통스러운 울음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그 울음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녀는 돌아왔다. 비록 상처투성이의 현실일지라도, 그녀는 다시 발을 디딘 것이다. 꿈을 파는 상점의 할머니가 말한 대로, 강렬한 쓴맛이 달콤한 꿈을 깨웠다. 하지만 그 쓴맛이 윤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리고 지아에게는 또 어떤 숙제를 안겨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아는 윤서의 떨리는 등을 토닥이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피어날 한 줄기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 희망은, 상점에서 팔 수 없는, 오직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