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피 묻은 곡물, 솟아나는 불씨
희뿌연 새벽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돌개울 마을의 지붕들은 축축한 이끼와 낡은 짚으로 뒤덮여 있었고, 굴뚝마다 피어나는 연기는 희망이라기보다는 겨우 명맥을 잇는 삶의 한숨처럼 보였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그래왔을 삶. 천해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이 땅의 평민들은 땅을 일구고, 하늘을 보며, 그저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강철은 아직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논두렁에 서 있었다. 그의 등에는 땀과 흙이 뒤섞여 있었고, 거친 손바닥은 삽자루를 쥔 채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열아홉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의 어깨는 이미 마을 어른들의 그것처럼 굳건했다. 늙은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시고, 어린 여동생 미리는 아직 한창 뛰어놀 나이. 강철은 무거운 가장의 짐을 묵묵히 짊어지고 있었다.
“형님, 새벽부터 나와 계셨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강철이 고개를 돌렸다. 열두 살 난 여동생 미리였다. 낡은 삼베옷을 입고 있지만, 생기 넘치는 눈빛만은 총총한 별처럼 빛났다. 미리는 작은 손에 갓 지은 보리밥이 담긴 주먹밥을 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아직 춥다, 돌아가 있어.” 강철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빛에는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는 오빠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주먹밥을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형님 힘들까 봐 제가 들고 왔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강철은 주먹밥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푸석한 보리밥의 맛. 이마저도 귀한 것이었다. 올해는 특히나 흉년이었다. 그런데도 제국에서 내려오는 세금은 한 톨도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났다. 천해 제국의 황궁은 금과 비단으로 휘황찬란하다는데, 그 모든 부귀영화는 이 땅의 평민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요 며칠, 관아 사람들이 마을을 기웃거린다고 아버지께서 걱정이 많으세요.” 미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내려오던 길에 보았다. 제국 병사 몇 명이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그들의 갑옷은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허리춤에는 늘어지지 않은 검이 위압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곡식을 걷어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흉년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그들의 눈빛은 더욱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걱정 마라. 내가 있잖니.” 강철은 미리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돌덩이가 얹힌 듯 무거웠다. 그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맨몸뚱이의 평민이 제국의 창칼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날 오후, 강철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갑옷을 입은 제국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수는 스무 명이 족히 넘었고, 선두에는 유달리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자가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빛나는 칼집의 검이, 그리고 손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금빛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었다. 선관(仙官)이었다. 제국에 복속된 낮은 계급의 수련자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무예가 뛰어나거나, 미약하지만 신비한 술법을 부릴 줄 알았다.
“돌개울 마을의 곡물 수확량이 보고와 다르다 들었다! 불경한 자들! 숨겨둔 양식이 있느냐? 어서 내놓지 못할까!” 선관의 목소리는 벼락처럼 마을을 강타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땅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위압적인 기운이 마을 전체를 짓눌렀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몇몇 노인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선관님,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올해는 흉년이라, 숨길 곡식조차 없나이다!”
하지만 선관은 그들의 비명을 무시했다. “시끄럽다! 어서 곳간을 열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경을 쳐 죽일 것이다!”
제국 병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집집이 들이닥쳐 곳간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곡식들이 자루에 담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얼마 전 겨우 거둬들인 햇곡식이었다. 한 자루, 두 자루…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서렸다. 이것마저 빼앗기면, 겨울은 고사하고 당장 다음 끼니도 기약할 수 없었다.
강철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억누르던 분노가 심장 속에서 거대한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노파였다. 자신의 마지막 곡식 자루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저항하다가, 병사의 몽둥이에 맞아 쓰러진 것이었다. 노파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미리가 겁에 질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더러운 놈들! 이럴 순 없어!”
강철은 이성을 잃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강철아! 안 돼!”
맨몸으로 달려드는 강철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병사 하나가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강철은 피하지 않고 어깨로 받아냈다.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울렸지만, 그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병사의 목을 붙잡고 내던졌다. 두려움에 질린 병사들이 잠시 주춤했다.
“어리석은 것! 감히 제국에 맞서려 드느냐!”
선관이 말을 타고 강철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짜증이 서려 있었다. 선관은 금빛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본래 이런 하찮은 벌레 따위에게 힘을 쓸 필요는 없으나, 네놈의 불경함은 용서할 수 없구나!”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이 다시 한번 번쩍이더니,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강철을 향해 날아왔다. 강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칼날은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선관의 힘은 강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강철 형님!” 미리의 비명이 찢어지는 듯 울렸다.
선관은 비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국의 권능 앞에서는 그저 한낱 먼지일 뿐이다. 명심해라, 평민은 평민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
병사들이 다시 달려들어 강철을 붙잡아 끌고 가려 했다. 강철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눈은 선관과, 그의 뒤에서 잔뜩 쌓여가는 곡식 자루들을 향했다. 그 자루들 속에는 겨울을 나야 할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담겨 있었다.
선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는 본보기로 죽여라. 다른 자들은 곡식 수탈을 계속하고.”
그때였다. 늙은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지만, 그의 눈은 강철의 눈과 똑같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내 아들을 죽이면, 내 아들을 죽이면…!”
병사들이 아버지를 막으려 달려들었다. 강철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안 돼!”
아버지는 결국 병사들의 손에 붙잡혔다. 선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저 늙은이도 함께 처리해라. 반항하는 자는 누구든 용서치 않는다.”
그 순간, 강철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피와 땀, 절망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무력감… 이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그의 심장을 휘감았다. 그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는 흙바닥에 스며들어, 마치 검붉은 맹세처럼 번져나갔다.
‘더 이상… 더 이상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억압된 분노는 이제 차가운 결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삶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왔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것은 차가운 강철처럼 단단하고, 불길처럼 뜨거웠다.
마을 사람들의 곡식이 모두 실려가고, 선관과 병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것은 피 흘리는 노파와 쓰러진 아버지,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강철은 풀려난 몸으로 아버지와 노파에게 달려갔다. 그의 손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강철은 작은 오두막에서 피 묻은 손으로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했다. 미리는 오빠의 곁에 앉아 말없이 흐느꼈다. 창밖으로는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고, 저 멀리 제국의 수도 방향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궁전의 불빛이 보였다. 평민들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려진 빛이었다.
강철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하나의 별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빛을 띠는 그 별은, 마치 그의 심장 속에서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닮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의 주먹이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단단히 쥐어졌다. 그것은 한낱 평민의 주먹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을 겨눌, 새로운 반란의 불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