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시야 너머, 썩어 문드러진 도시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먼지와 핏물, 그리고 역겨운 썩은 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였다. 손에 든 낡은 나이프는 언제나 내 심장의 박동과 함께 울렸다. 이제는 칼날의 차가운 금속이 제 살처럼 익숙하다.
민혁. 그 세 글자가 내 뇌리를 스칠 때마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용암이 끓어올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차갑게 식어 내려앉는 듯한 고통. 그 고통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끼이익… 꺽꺽…
건물 그림자 사이에서 기어 나오던 좀비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축 늘어진 피부, 텅 빈 눈동자, 그리고 핏자국으로 얼룩진 너덜너덜한 옷. 하지만 그 움직임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 수천 번도 더 봤을 광경.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내 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고, 나이프를 든 손목을 비틀어 정수리에 박아 넣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피와 살점이 튀었다. 역겨운 냄새가 한층 더 진해졌지만, 이젠 익숙한 비린내였다. 쓰러진 좀비의 경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이프를 뽑았다. 끈적이는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러진 좀비의 옷깃에 걸린 낡은 인식표가 눈에 띄었다. 녹이 슬어 글자는 희미했지만, 익숙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사자 문양. 민혁이 이끄는 무리의 상징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이 근처를 맴돌고 있다는 증거. 내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맺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모든 감각이 정지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악몽이 덧없이 재생되었다.
수백 마리의 좀비가 우글거리는 지하 주차장. 우리는 겨우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절망은 그늘처럼 우리를 덮었고, 식량도, 탄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한 절망. 탈출구는 하나뿐이었고, 겨우 한두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였다. 먼저 도망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 민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지만, 입가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서준아, 미안하다. 이건… 어쩔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떨려서, 바람 소리에 묻힐 듯 희미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내 등에 느껴지던 거친 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몸. 눈앞에 펼쳐지던 좀비들의 아귀. 그들의 시뻘건 눈동자와 썩어 문드러진 손톱이 순식간에 내게로 뻗어왔다.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이 내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덮치던 좀비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빛 속으로 사라지던 민혁의 뒷모습.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던 그 차가운 등짝.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좀비들의 먹이로 던져주고, 자신은 살기 위해 달아났다. 민혁이 내 이름과 함께 울부짖었던 ‘서준아!’ 하는 절규가 지하 주차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진심 어린 외침이 아니었다. 자기합리화였다. 너를 버리고 간 나를 용서해 달라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올라왔고, 심장 대신 복수의 칼날을 품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오직 민혁, 네게 갚아주기 위해서.
인식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한때 번화가였던 구시가지였다. 폐허가 된 건물 숲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밟히는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삭막한 고요함 속에 내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몇 블록을 더 지나자,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 마치 폐허 속에서 피어난 환영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듯했다. 이곳이 분명했다. 민혁, 네가 숨어있는 곳.
나는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무너진 버스 잔해 뒤에 웅크려 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낡은 상점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둠 속에서 등대처럼 빛났다.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대장님 지시대로 보급품은 다 모아놨습니다. 이제 이동만 하면 됩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옆의 다른 목소리가 덧붙였다.
“민혁 대장님은 지금 안쪽에 계십니다. 곧 회의가 시작될 겁니다.”
회의. 그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민혁이 저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내 발밑에 깔린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다. 분노와 증오가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서준이 아니었다. 죽음의 아귀에서 기어 올라온, 살아있는 복수 그 자체였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내 체온을 흡수하는 듯했다. 내 칼날은 이미 민혁의 피를 갈망하고 있었다.
민혁. 네가 나를 버린 그날부터, 나는 너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
이제… 널 만나러 간다. 네가 나를 외면했던 그 방식 그대로, 나는 네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네가 내게 안겨준 절망을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 지옥에서 온 내가, 이제 네 지옥이 되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