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크라시스 지하의 심연
## 1장. 균열
새벽 세 시, 아크라시스 마법학원의 중앙 홀은 차가운 푸른빛으로 잠겨 있었다. 고대 크리스털과 초고밀도 합성 강철로 지어진 아치형 천장은 별이 흩뿌려진 우주를 형상화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유리 돔 아래 고요히 잠든 기술의 무덤 같았다. 200년 전, 마법과 과학의 경계가 무너진 ‘대융합’ 시대 이후, 아크라시스는 마법 연구의 최전선이자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다는 자부심으로 빛나는 요새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늘 숨 막히는 공간일 뿐이었다.
권이현. C클래스 소속, 성적은 늘 중위권 언저리. 특별한 재능도, 그렇다고 타고난 부나 지위도 없는 흔하디흔한 학생이었다. 억지로 입학한 건 아니었지만, 이 엘리트들의 성지에서 나는 늘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특히 지금처럼 학기말 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는 더더욱.
“이현아, 아직도 안 자?”
수많은 홀로그램 학습 보드가 떠다니는 학습실 구석,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나를 깨운 건 A클래스의 수석이자 나의 소꿉친구인 유진이었다. 그녀의 말간 얼굴에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맑은 지성이 빛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완벽한 그녀는 이 학원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 유진아. 너도 아직 안 갔어?”
“응. 마지막 과제 마무리하느라. 너는 또 며칠 밤샌 얼굴이네. C클래스라고 너무 기죽지 마. 너도 재능 있으니까 여기 있는 거잖아.”
유진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위로했지만, 나는 그 말에 조금도 위로받지 못했다. 재능? 내가? 나는 그저 남들보다 마력 흐름을 분석하는 데 조금 더 섬세했을 뿐, 강력한 마법을 구현하거나 복잡한 증폭 회로를 설계하는 데는 늘 한계를 느꼈다. 유진처럼 한 번 훑어보면 모든 개념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크라시스에서 재능은 숨 쉬는 공기 같지. 넘쳐나는 게 재능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마력 증폭기 회로 설계가 너무 꼬여서.”
“그거? 데이터베이스에 비슷한 사례 많을 텐데? 혹시 율리안 교수님 과제야? 그분은 늘 기상천외한 걸 내주시지.”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학습 보드 쪽으로 다가왔다. 홀로그램으로 펼쳐진 복잡한 마력 회로 도면을 본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 이건… 좀 오래된 방식인데? 융합 시대 초기의 설계 같아. 이런 걸 왜 내주셨지?”
“그러게. 교수님은 늘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이상한 걸 내주셔.”
“흠… 이 부분, 이 이중 공진 스택 구조가 문제네. 여기는 전류를 좀 더 강하게 밀어 넣어야 균형이 맞아. 아니면 이 핵심 코어의 결정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잠깐.”
유진의 눈이 다시 한번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도면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 설계, 어디서 본 것 같아. 아주 예전에… 금지된 자료 목록에서 살짝 스쳤던 것 같기도 하고. ‘아크라시스 초기 연구 기록’인가? 설마 그걸 교수님이?”
“금지된 자료?”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크라시스의 모든 자료는 디지털화되어 엄격하게 관리된다. 금지된 자료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
“응. 오래되고 위험해서 폐기된 기술이나 이론들. 주로 마력 폭주나 생체 개조 쪽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거랑 연관 있을 리는 없겠지. 아무튼, 내 생각엔 여기 출력 값을 조금만 조절해 봐. 그럼 균형이 맞을 거야.”
유진의 조언대로 회로를 수정하자, 홀로그램 도면 중앙의 마력 코어 시뮬레이터가 안정적으로 푸른빛을 내뿜었다. 나의 며칠간의 고생이 단 몇 분 만에 해결된 순간이었다.
“고마워, 유진아! 역시 너 없으면 난…”
“됐어, 됐어. 빨리 가서 자. 내일 오전에 율리안 교수님 실습 수업이잖아. 지각하면 그 괴팍한 양반한테 죽어.”
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홀로그램 보드를 정리하고 학습실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은 늘 나의 한계를 상기시키는 듯했다. ‘금지된 자료’라… 그녀의 무심한 한마디가 묘하게 뇌리에 박혔다. 율리안 교수는 이상한 사람이다. 늘 고대의 마법에 집착했고, 가끔 그의 연구실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기계음이나 섬뜩한 진동이 흘러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아크라시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천재였기에, 아무도 그를 대놓고 의심하지 않았다.
유진이 나간 후, 나는 다시 홀로그램 도면을 띄웠다. 이 이중 공진 스택 구조. 그녀는 이것이 금지된 자료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
다음 날 아침, 율리안 교수의 마력 제어 실습 시간.
율리안 교수는 백발의 노학자였다. 그의 눈빛은 늘 깊은 곳을 응시하는 듯했고, 낡은 가죽 코트 안에서는 늘 고풍스러운 마력 감지기가 째깍거렸다.
“권이현, 너는 이쪽이다. 자네에게는 좀 더… 특별한 실습을 시켜야겠군.”
교수님은 나를 지목하며 실습실 한쪽 구석의 낡은 격리실로 안내했다. 다른 학생들은 최신식 마력 발생 장치 앞에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내가 안내된 곳은 음침한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안쪽에는 투박한 철제 장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낡은 패널 위에는 닳아버린 고대어 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교수님?”
“이것은 ‘에테르 수집기’라 불리던 고대의 장치다. 대융합 시대 초기에 잠시 사용되다가 효율성 문제로 폐기되었지. 자네는 이 장치를 가동시켜 마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연습을 하게 될 걸세.”
에테르 수집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크라시스의 모든 장치는 최첨단 마력 증폭기와 정제기를 사용하는데, 이런 고대 유물 같은 장치를 실습에 쓴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장치는 마력 흐름이 매우 불안정하다. 다른 최신 장치들보다 훨씬 섬세한 제어 능력을 요구할 걸세. 자, 그럼 시작하게.”
율리안 교수는 내게 고대어 문자가 새겨진 마력 결정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결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묵직하면서도 어딘가 거칠었다. 나는 결정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제어하며 장치에 연결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의 불이 들어왔다.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장치 내부에서 웅장하면서도 불안정한 진동이 느껴졌다.
다른 학생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긴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력 흐름이 불안정하다고? 오히려 그런 점이 나의 분석 능력과 섬세한 제어 능력에 딱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 결정에서 끌어낸 에테르를 장치 내부로 밀어 넣자, 고대 문자가 새겨진 패널이 더욱 밝게 빛났다. 윙-하는 낮은 공명음이 격리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마력의 흐름을 조절하며 장치의 에너지를 안정화하려 애썼다.
그때였다.
장치 내부에서 갑자기 강렬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패널의 빛이 붉게 물들더니, 기기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폭주한다!”
율리안 교수의 외침과 함께 나는 황급히 마력 공급을 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장치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굉음을 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푸른색과 붉은색 섬광이 번갈아 터지며 격리실 안을 번개처럼 휘감았다.
“권이현! 벗어나!”
교수님이 제어 마법을 쓰려 했지만,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마력 파동은 모든 마법을 간섭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격리실의 문은 이미 봉쇄된 상태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장치 중앙의 패널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그 순간, 패널이 떨어져 나간 장치 내부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단순한 기계 부품이 아니었다.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그 통로는 어두컴컴한 심연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언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불규칙하게 꿈틀거리는 검은색 섬유질과 핏줄 같은 것들이 얽혀 있었고, 그 사이에서 옅은 비명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기계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생체적인,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같았다.
나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패널 아래에는 이런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이 격리실은 지하가 아니었다. 율리안 교수의 연구실 건물 3층에 위치한 평범한 실습실이었다. 그런데, 이 통로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거지? 그리고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걸까?
“권이현! 어서!”
교수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순간, 거대한 마력 파동이 나를 덮쳤다. 나는 장치의 폭주에 휘말려 벽에 강하게 내던져졌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쓰러지면서도, 나는 마지막으로 그 통로 안쪽을 보았다.
검은 섬유질 사이에서 번쩍이는 푸른빛. 그 빛 속에서 잠시 나타난 것은… 거대한 눈동자였다. 기계적이지 않은, 어떤 생명체의 눈. 그것은 마치 수억 년의 어둠 속에 갇혀 고통받는 존재의 눈처럼, 깊고 무시무시한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익숙한 천장과 멸균된 공기. 팔에는 마력 주입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현아! 괜찮아? 정신이 들어?”
“유진아…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야?”
“세 시간 정도. 큰 부상은 없어. 마력 과부하랑 쇼크 정도라고 하던데… 실습실은 완전히 봉쇄됐고, 율리안 교수님도 지금 상급 교수회에 불려 가셨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들 네가 율리안 교수님의 마법 유물을 폭주시키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고 하던데.”
율리안 교수님의 마법 유물? 그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눈동자. 그 기계 안에서 울부짖던 생체적인 소리.
“그게… 유물이 아니었어.” 나는 목소리를 깔았다. “율리안 교수님은…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숨겨? 무슨 소리야?” 유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 장치 안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어. 그리고 거기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어.”
유진의 눈이 커졌다. “지하? 건물 3층 실습실인데, 지하 통로라니? 그리고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고? 이현아, 네가 쇼크 상태에서 환각을 본 거 아니야? 아니면 마력 폭주로 정신이 혼미했던 걸 수도 있고…”
“아니야! 난 똑똑히 봤어! 거대한 눈동자였어… 분명히.”
유진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아니,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조차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으니까.
“이현아, 일단 쉬어. 율리안 교수님 일은 상급 교수회에서 조사할 거야. 아크라시스 지하에는 중앙 마력 코어랑 에너지 저장소가 있는 건 알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모든 시설은 최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어. 네가 말하는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어.”
유진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는 여전히 그 검은 섬유질과 푸른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유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마력 폭주로 인한 일시적인 환각. 그러나 내 직감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아니야. 그건 현실이었어.’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 ‘에테르 수집기’라 불리던 고대 장치.
패널이 떨어져 나간 그 순간,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 파동은 일반적인 마력 폭주와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어떤 거대한 존재의 ‘비명’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내가 봤던 그 푸른 눈동자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율리안 교수의 마력 증폭기 회로 과제. 유진이 ‘금지된 자료’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회로.
문득, 그 회로의 이중 공진 스택 구조가 그 ‘에테르 수집기’의 심장부에서 보았던 에너지 흐름과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기괴한 장치와 연결하기 위해 설계된 듯한.
단순한 우연일까?
아크라시스 학원의 지하에는 중앙 마력 코어와 에너지 저장소만 있다고?
아니, 유진은 몰랐을 뿐이다.
그 고요하고 빛나는 심장부 아래,
아크라시스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마력의 근원 아래,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가 봉인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아크라시스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나는 그 비밀의 문을 아주 잠깐, 아주 우연히, 열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문을 다시 닫을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거대한 심연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불안감과 함께, 묘한 흥분이 차올랐다.
나는 C클래스의 흔한 학생, 권이현.
하지만 어쩌면 내가, 이 거대한 비밀을 풀어낼 유일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아크라시스 지하에는 대체 무엇이 잠들어 있는가.
그리고 율리안 교수는, 그 비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는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깊은 밤, 아크라시스의 중앙 홀은 여전히 차가운 푸른빛으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평온함 아래 숨겨진 심연의 균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균열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새로운 밤의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