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 해 밤의 그림자, 피의 서막
밤은 깊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비령산맥(飛靈山脈)은 뭇 별들이 흩뿌려진 천공 아래서도 그 형체를 숨기지 못했다. 산맥의 정점에 솟아오른 청명궁(淸明宮)은 오늘 밤, 수백 개의 옥등(玉燈)과 영기(靈氣) 서린 보석들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해팔황(四海八荒)의 고승(高僧)과 대사(大師)들이 모여 청명궁의 궁주(宮主)이자 강호 정파(正派)의 영수(領袖)인 청명(淸明)의 오십 년 공력(功力) 돌파를 축하하는 연회였다.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고, 그 환희는 마치 어둠을 찢어발길 듯 거만하게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 빛과 소음 속, 가장 높은 봉우리 끝, 바람마저 얼어붙을 듯한 절벽 위에는 한 사내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지만, 사내의 눈은 흔들림 없이 청명궁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흡사 천 년 묵은 한(恨)이 서려 있는 듯, 차갑고 깊었다.
백련(白蓮). 그것은 한때 강호의 모든 이가 우러러보던 이름이었다. 순수하고 고결한 검법으로 강호의 난세를 잠재웠던 백련검존(白蓮劍尊). 그러나 열두 해 전, 그 이름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가장 믿었던 벗이자,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던 사제 청명에 의해.
“청명… 네놈은 오늘도 웃고 있구나.”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처럼 싸늘했다. 단전(丹田)이 깨지고 온몸의 경맥(經脈)이 찢겨나간 채, 그는 만 년 빙하 아래 펼쳐진 마역(魔域)에 버려졌다.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를 집어삼키려는 마(魔)의 기운이었다. 온몸을 잠식하는 마기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심장에 박힌 배신의 고통은 마저도 능가했다. 결국, 그는 마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증오가 그를 마(魔)로 만들었다.
온몸의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튀어나오는 고통 속에서, 그는 마염(魔炎)으로 자신의 육신을 다시 빚었다. 정파의 영기(靈氣)를 거부하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 마공(魔功)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지옥의 검은 마신이었다. 과거의 백련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복수만을 갈망하는 그림자뿐이었다.
‘그날의 피와 울부짖음을 네놈은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영기(靈氣)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단순한 영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만 년 빙하의 한기와 만 마리의 악귀가 서려 있는 듯, 주변의 공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강대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청명궁 상공을 가르고 있던 영기 결계(結界)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연회장 안의 대가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영기 흐름에 민감한 몇몇 고수들은 찰나의 이질감을 느꼈다.
“저… 저기, 밖이 어째서 이렇게 싸늘해졌지?”
“설마 마(魔)의 기운인가?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청명궁의 결계는 천하 제일…”
중얼거림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백련의 검은 손에서 응축된 마기(魔氣)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공격이 아니었다. 마역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저주였다. 청명궁 상공의 굳건했던 결계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거대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연회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오색찬란한 수정 연등이 폭발했다.
콰앙!
수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진 수정 파편들은 마치 살아있는 검날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고하게 앉아 술을 나누던 고승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서렸다.
“무슨 짓이냐! 누가 감히 청명궁을 능멸하는가!”
청명의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앞의 혼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십 년 공력 돌파의 기쁨 대신, 불쾌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의 찢어진 결계 너머, 절벽 끝의 그림자를 향했다.
“누구냐!”
청명의 손에서 푸른 영기(靈氣)가 솟아나오며 연회장의 혼란을 진정시켰다. 그의 강력한 공력이 주변의 기를 억누르자, 비로소 대가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절벽 위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그림자가 걸어 내려오는 듯,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청명궁 가까이 다가오자, 주변의 온도는 더욱 낮아졌다. 차가운 한기가 연회장 내부까지 스며들며, 모두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궁주님… 저 자는…!”
청명의 옆에 서 있던 호법(護法)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을 감싼 마기(魔氣)와 눈에서 번뜩이는 핏빛 광채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의 검은 도포는 마치 밤하늘 자체를 찢어낸 듯했고, 그가 걸어올 때마다 땅바닥에 서리가 피어났다.
백련의 시선은 오직 청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십 년… 아니, 열두 해 만이로군, 청명.”
낮게 깔린 목소리는 오래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가 닿는 순간, 청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동공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 목소리, 그 한서린 기운…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죽었을 터인데. 자신이 직접 확인했는데!
“네… 네놈은… 백련…?”
청명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의 입에서 백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백련? 백련검존? 죽었다던 그가 어째서? 그리고 이 마기는 대체…
백련은 청명의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네놈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마역(魔域)의 심연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어 사라졌을 것이라고. 네놈이 나의 백련검도를 찬탈하고, 나의 궁을 차지하고, 나의 이름 위에 군림하며 쾌락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살아남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비수처럼 청명의 심장을 꿰뚫었다. 백련의 검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청명궁의 상공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듯 거대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푸른 번개가 칠흑 같은 마기 속에서 번뜩이며, 하늘에서 거대한 검은 번개가 청명궁을 향해 꽂히듯 떨어졌다.
“나는 돌아왔다, 청명. 네놈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이제 네놈의 모든 것을 빼앗으러.”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섬광과 함께, 청명궁의 거대한 옥탑 중 하나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연회장은 비명과 혼란으로 뒤덮였다. 백련의 눈은 여전히 청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잡아먹을 듯이 끈적하고 집요했다.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백련의 그림자가 다시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연회장을 뒤덮은 비명과 파괴의 소음을 뚫고, 청명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청명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과 과거의 망령 같은 존재에 사지가 마비된 듯 서 있었다. 그의 등골에는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백련의 등장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선고였다.
청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에 뒤섞여 일그러졌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밤의 서막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펼쳐질 피의 향연이 얼마나 잔혹하고 절망적일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