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닫힌 문 안의 죽음
새벽안개가 비룡문(飛龍門)의 웅장한 기와지붕을 휘감고 있었다. 명산(名山) 천주봉(天柱峰) 중턱에 자리 잡은 비룡문은 강호(江湖) 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문파였다. 새벽 수련을 알리는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기 전,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그 시간, 작은 소란이 문파의 적막을 깨트렸다.
“벽해(碧海) 장로님! 장로님!”
문 지킴이 제자 중 하나인 청년 무사, 진우(眞雨)가 벽해 장로의 서재 앞에서 연신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평소 같으면 새벽녘에도 서재의 등불을 밝히고 고서를 탐독하시던 장로님이건만, 오늘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진우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다시 한 번 힘껏 문을 두드렸다. “장로님! 무고하신지요!”
여전히 답이 없자, 진우는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단단한 나무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핏빛 액체를 발견하고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피였다. 서둘러 가장 높은 무위(武威)를 지닌 천호(天虎) 문주를 찾아갔다.
천호 문주는 새벽 수련을 위해 이미 일어나 있었다. 진우의 다급한 보고를 듣자마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벽해 장로는 비룡문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귀한 고서와 진귀한 비급(秘笈)들을 해독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룡문 전체가 흔들릴 터였다.
문주와 호법(護法) 장로 몇 명이 진우와 함께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는 이미 다른 제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문지방 아래로 스며 나온 핏물은 이제 제법 넓게 퍼져 있었다.
“누가 문을 열어보았느냐?” 천호 문주의 목소리에는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예, 문주님. 저희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습니다. 안에서 걸어 잠근 듯합니다.” 한 호법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호 문주는 문에 다가가 직접 손잡이를 돌려보고 어깨로 밀어보았다. 육중한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살필 수 없었다.
“강제로 연다.”
문주의 명령에 따라 호법 장로 두 명이 문에 매달려 온 힘을 다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쿵, 쿵! 몇 번의 육중한 충격음 끝에, 문을 안에서 가로지르던 빗장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굳게 닫혔던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서재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탁자 위에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으셨을 벽해 장로의 안경과 붓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 벽해 장로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장로님!”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문주와 장로들이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벽해 장로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깨끗하고도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피가 흥건하게 배어 있었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천호 문주의 눈이 매섭게 서재 안을 훑었다. 방 안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유일한 창문은 쇠창살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게다가 창문 역시 안쪽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한 호법 장로가 경악하여 중얼거렸다.
외부에서 들어올 수 없었다면, 장로님은 방 안에 홀로 계셨을 터. 그렇다면 자살인가? 그러나 가슴팍의 상처는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깔끔하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현장에는 어떠한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칼 한 자루, 비수(匕首) 한 자루조차 없었다.
천호 문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강호에 비룡문의 명성이 알려진 이래, 이런 기묘하고 충격적인 사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이 안에서 잠긴 밀폐된 공간에서, 흔적도 없이 살해당한 장로. 그것도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이자, 비룡문의 방어 체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장로였다.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밀실 살인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 사건은 비룡문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터였다. 자칫하면 비룡문의 방어 체계가 뚫렸다는 오명을 쓰고, 강호 전체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천호 문주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지 마라. 발설하는 자는 문규(門規)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사마(邪馬) 협객에게 전음(傳音)을 보내라. 천기추(天機樞) 명추(明樞) 대인께 비룡문으로 와달라고 청하라.”
사마 협객은 비룡문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정보통이었다. 그리고 ‘천기추’ 명추는 강호에서 떠도는 수많은 미스터리를 풀어낸 기인(奇人)이었다. 그의 별호처럼, 그는 천기(天機)의 중요한 축(樞)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곳마다 그의 발자취가 남았지만, 그의 무공(武功)이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오직 그의 비범한 두뇌와 날카로운 추리만이 강호에 회자될 뿐이었다.
***
닷새 후, 비룡문의 한적한 별채에 낯선 인물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유학자(儒學者)에 가까운 풍모였다. 넉넉한 품의 연회색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아무것도 차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지만, 어딘가 세상일에 무심한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바로 천호 문주가 초청한 천기추 명추였다.
천호 문주는 직접 그를 맞이했다. “명추 대인, 이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주시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명추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강호에 희한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어찌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평온했다.
“흥미롭다고 말씀하시니… 저희로서는 그저 참담할 따름입니다.” 천호 문주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참담함 속에서 진실은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법이지요.” 명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어서 안내해 주시겠소이까? 닫힌 문 안의 죽음이란, 상상만으로도 꽤나 오묘한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명추는 천호 문주의 안내를 받아 벽해 장로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앞에는 여전히 감시하는 제자들이 서 있었다. 방 안은 사건 발생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피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인 묘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명추는 문턱을 넘어서며 서재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배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천호 문주와 호법 장로들이 그의 옆에 서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명추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서성였다. 쓰러져 있는 벽해 장로의 시신은 이미 깨끗한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시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책상, 책장, 창문, 그리고 바닥을 꼼꼼하게 살폈다.
“창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이 문도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고 하셨지요?” 명추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인. 저희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천호 문주가 단호하게 답했다.
명추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쇠창살은 견고했고, 창문 자체도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창틀을 쓸어보고, 창문 틈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곳은 천주봉 중턱,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어올 텐데… 창틀에 먼지가 거의 없군요.”
천호 문주와 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창틀의 먼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벽해 장로님께서 워낙 깔끔하신 분이셨습니다. 매일 아침 서재를 직접 정돈하셨지요.” 한 호법 장로가 말했다.
명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합니다. 장로님은 매일 창문을 닦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 창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습니다. 어떻게 닦으셨을까요?”
그 말에 모두가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으므로, 외부에서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이 높은 곳의 창문을 닦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쇠창살이 설치된 상태에서 완벽하게 닦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명추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방 한가운데로 돌아와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가 흩뿌려진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의 눈이 문득 한 곳에서 멈췄다. 방 구석, 책장 아래의 그림자 진 곳이었다.
“이것은…?” 명추는 그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의 손이 그림자 속 작은 틈새를 향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그것은 아주 작고 얇은, 마치 새의 깃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깃털과는 달랐다. 투명한 빛을 띠며, 손에 닿자마자 미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천호 문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대인?”
명추는 깃털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미세한 흥미가 스쳤다.
“음… ‘환영의 비늘(幻影鱗)’이로군요. 보통의 새가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희귀한 비조(飛鳥)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특히 밤에 달빛을 받으면 그 빛이 더욱 영롱해진다고 합니다만…”
그는 깃털을 다시 그림자 속 틈새에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호 문주는 답답함을 느꼈다.
명추는 일어서며 서재 안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었다.
“이 밀실 살인은 분명합니다. 침입자가 없었고, 흉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벽해 장로님은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는 천호 문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허나, 이 살인 사건은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닫힌 문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명추의 말은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대인, 그 말씀은….” 천호 문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명추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서재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 모든 불가능함이 바로 답을 품고 있습니다. 닫힌 문 안의 죽음은, 닫힌 문 밖에서 시작된 것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는 서재 문을 나섰다. 남겨진 이들은 명추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각자의 머리를 싸매야 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밀실 살인 사건의 실마리가, 어쩌면 저 알 수 없는 기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