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균열의 시작 (균열의 시작)

이준은 지친 몸을 소파에 파묻었다. 길고 긴 야근 끝에 간신히 집에 돌아온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삐걱이는 현관문을 닫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가로지를 때마다 그의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씻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젠장, 진짜 죽겠다.”

투박한 중얼거림과 함께 이준은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파의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툭’ 하는 가벼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스르륵 눈을 떴다. 탁자 위, 언제나 손이 닿는 곳에 두는 TV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가 던진 것처럼 탁자 끝에서 살짝 벗어나 마룻바닥에 가볍게 부딪힌 모양새였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이준은 툴툴거리며 허리를 숙여 리모컨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 탁자 정중앙에 정확히 놓아두었다. 손때 묻은 리모컨의 플라스틱 감촉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몇 분 후, 주방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낡은 아파트라 가끔 보일러 배관에서 소리가 나기도 하고, 옆집에서 뭘 하는 소리가 넘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고 집요해졌다. 냄비 뚜껑이 들썩이는 소리,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 소리, 이내 수도꼭지가 ‘콸콸’ 하고 스스로 열리는 소리까지.

“뭐야?”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에 움푹 파였던 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복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는 묘한 불협화음처럼 그의 귀를 괴롭혔다.
주방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피곤한 뇌를 순식간에 깨웠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수구를 통해 물이 역류할 것만 같았다. 그는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그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물줄기가 갑자기 뚝 멈췄다. 그리고 곧 다시 ‘콸콸’ 하고 쏟아져 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수도꼭지와 씨름하듯.

“장난치지 마. 피곤하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텅 빈 아파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메아리쳤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내 물이 멈추고, 이번에는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가 ‘쉬이익’ 하고 끓기 시작했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주전자 주위로 희미한 김이 피어 올랐다.

이준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설마 누가 조작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피곤해서 환각을 보는 건가?’ 어떻게든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합리화하려고 애썼지만, 이성과 논리가 그의 뇌를 빠르게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거실의 TV가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켜졌다. 화면은 온통 백색 노이즈로 가득했다. 노이즈 속에서 희미하게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마치 저 너머에서 이 세계로 넘어오려는 듯, 간절하게 몸부림치는 그림자 같았다.

“안 돼…”
이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어서 책장 위의 책들이 한 권씩 뽑혀 나와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빼곡히 박힌 두꺼운 책들이 마치 중력을 거부하듯 유영했다. 이준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책들은 이내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더니,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현관 쪽으로 날아갔다. ‘쾅, 쾅, 쾅!’ 현관문에 맹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울렸다. 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이준은 소파 뒤로 숨어 웅크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추웠다. 단순히 공기가 차가운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얼어붙는 듯한, 심연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 냉기였다. 그의 숨결이 하얗게 서렸다. 냉기는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위압감이었다. 이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읽었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거실 한가운데, 바닥에 굴러떨어진 액자 파편들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여들었다. 그림자는 일렁였다. 형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이질적이었다. 고대의 숲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제단에서나 느낄 법한, 아니면 태초의 혼돈에서 막 깨어난 거대한 존재에게서나 풍길 법한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악령이나 유령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태고의 어둠을 간직한 존재였다.

그림자가 짙어지자, 아파트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했다. 벽면의 시멘트가 울렁거렸고, 천장의 형광등이 번쩍이며 꺼졌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귀에서는 ‘삐이-‘ 하는 이명이 들렸다. 순간, 그림자 속에서 섬뜩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눈동자처럼 보였다. 맹렬하고, 무자비하고, 그리고… *굶주린* 눈동자.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이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의 귓가에 알 수 없는 언어가 속삭였다.
“크라’아르… 사’베크… 라’투스…”
낮고 쉰 목소리, 마치 수천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존재가 겨우 입을 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뇌리를 파고들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이준은 그 언어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이 세계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라, 이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 만한 고대 마법의 주문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동시에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뜨거운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차가운 공포 속에서 생경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마치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옅은 빛이 깜빡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비볐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거대한 손아귀처럼 이준을 향해 뻗어왔다. 그의 눈앞에서 아파트 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벽 너머로는 끝없는 어둠과 함께, 보랏빛으로 섬뜩하게 빛나는 거대한 균열이 아른거렸다. 균열 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마치 굶주린 입처럼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듯 거칠게 움직였다.

“도망쳐… 이준… 도망쳐야 해!”
이준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이미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자의 손아귀가 그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균열 너머에서 더욱 거대하고 깊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카라’아르…!”

그 소리와 함께 이준의 온몸을 휘감던 열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의 시야는 일순간 눈부신 백색광으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