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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심연을 삼키고, 침묵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망각의 심연,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이 잊힌 듯한 고대 지하 유적의 깊숙한 곳에서 단우와 청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 뚫고 지나온 보이지 않는 결계는 그들의 진원을 미미하게 흩트려 놓았고,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감쌌다.
“점점 더 깊어지는군요.” 청아의 낮은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렸다. 그녀의 손에 든 영등(靈燈)이 희미한 푸른빛을 뿌렸지만, 그마저도 거대한 어둠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벽면에는 고대 문양들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간혹 정체 모를 괴수의 형상이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매서운 눈은 칠흑 같은 공간을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 그의 영안(靈眼)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단순히 강력한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것이 잠들어 있거나, 혹은 억눌려 있는 듯한 불길한 감각.
“영기의 흐름이 이상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 단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멸진경(滅盡境) 초기의 진원은 이미 최고조로 끌어올려져 있었다.
청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지면에 닿은 발끝에서부터 은은한 영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이곳의 구조는 여태껏 지나온 곳들과 다릅니다. 이 압도적인 규모는… 마치 무언가를 위한 거대한 제단 같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가리킨 곳. 그곳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영등의 빛마저 집어삼킬 듯한 칠흑의 중앙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대의 시간 속에 갇힌 듯한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겹겹이 새겨진 문양들은 눈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미지의 상형문자였고, 그 위에는 인간의 머리보다도 큰, 검푸른 빛을 띠는 구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미동도 없이,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저것은…?” 청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그녀의 영력마저 흐트러지는 듯했다.
단우는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분명 죽은 물체인데, 그 구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압도할 듯 거대했다. 어쩌면, 살아있는 것보다 더 끔찍한 무언가.
“고대의 영보(靈寶)인가? 아니면….” 단우의 시선은 구체에서 석조 구조물, 그리고 다시 벽면으로 이어졌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화. 영등의 푸른빛 아래, 벽화 속 그림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며, 모든 생명체가 비명을 지르며 스러져가는 모습. 그리고 그 끝에는 몇몇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들이 거대한 기도를 올리며, 방금 그들이 본 구체를 중심으로 거대한 진법을 펼치는 듯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봉인 의식.” 단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 구체는 영보가 아니야. 무언가를 가두고 있는 봉인석이다.”
그때였다. 으음- 하는 낮은 진동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발밑의 석판들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검푸른 구체가 놓인 석조 구조물에서부터, 겹겹이 새겨진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붉은색, 푸른색, 그리고 다시 금빛으로 번쩍이며, 마치 죽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듯했다.
“단우 님!” 청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구체 위로 빛의 파동이 일렁였다. 심장 박동과도 같은 그 빛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어둠을 밀어내며 방대한 공간을 섬뜩한 색으로 물들였다. 벽화 속 존재들이 꿈틀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벽화 속에서 기괴한 괴수들이 서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환영이 아니었다. 영력으로 벼려진 듯한, 실체가 있는 그림자 괴수들이었다. 고통과 절규로 뒤틀린 얼굴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그것들이 벽화에서 벗어나 허공을 유영하며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단우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청아, 구체를 건드리지 마! 이 봉인 의식을 멈춰야 해!”
수십 마리의 그림자 괴수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쌌다. 멸진경의 진원마저 압도할 듯한 기세였다. 그림자 괴수들의 공격은 마치 고통을 모르는 망령과 같았다.
단우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림자 괴수들이 산산조각 났지만, 그와 동시에 벽화에서 새로운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끝없는 파도 같았다.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너무 강합니다! 이대로는 진원이 고갈될 거예요!” 청아가 외쳤다. 그녀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그림자 괴수들의 공격을 피했고, 손끝에서 쏘아내는 섬광으로 몇몇을 흩뜨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유려했지만, 그 얼굴에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구체는 붉은색, 푸른색, 금빛을 넘어 이제는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터지기 직전인 것처럼. 그 빛이 바닥의 문양들을 타고 흘러내리자, 바닥의 석판들이 갈라지며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속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우는 검을 쥔 채 몸을 돌려 구체를 노려봤다. 구체가 봉인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괴수가 아니었다. 벽화 속의 참상은 한 존재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다. 구체는 그 존재를 가두고 있었고, 이 그림자 괴수들은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자, 동시에 봉인된 존재의 힘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증거였다.
그림자 괴수들이 다시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세 마리였다. 그것들의 눈은 섬뜩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막아봐야 소용없어! 봉인은 이미 흔들리고 있어!” 단우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의 진원은 봉인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과 그림자 괴수들의 압력 속에서 미친 듯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체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구체 위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모두 불길하게 타오르며 마치 살아있는 피부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찰나의 순간, 단우는 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뜩한 두 개의 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모든 생명을 증오하는 듯한 그 눈동자가 구체의 틈새로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 존재는 고통에 잠식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악의 그 자체였다.
“이건… 차원의 틈새야! 봉인이 풀리고 있어!” 단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봉인이 완전히 풀리면, 이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존재가 풀려나는 것이다.
그림자 괴수들이 다시금 단우를 덮쳤다. 단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적! 소리와 함께 그림자 괴수들이 찢겨 나갔지만, 그의 몸에도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의 진원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체는 이제 모든 빛을 집어삼키려는 듯 검은 소용돌이로 변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벽화 속의 마지막 그림, 즉 봉인된 존재의 형체가 섬뜩하리만큼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여기 갇히게 될 거야!” 청아가 절박하게 외쳤다. 균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기운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단우는 결단했다. 그는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안에 갇힌 존재가 해방된다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막아야 해! 완전히 풀리기 전에, 다시 봉인해야 해!” 단우는 온몸의 진원을 끌어모았다. 이미 고갈 직전이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응축되더니, 이내 거대한 검광(劍光)으로 변해 검은 구체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검광이 구체에 부딪혔다. 구체는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더욱 강력한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며 단우의 검광을 집어삼켰다. 구체의 틈새에서 번뜩이는 그 두 눈이, 마치 단우를 비웃는 듯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단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속 진원의 핵이 미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봉인이 풀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어둠의 기운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들은 이제 심연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청아의 눈이 벽화 속 어느 한 지점을 포착했다. 거대한 봉인 진법의 중앙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어떤 문양. 그것은 봉인된 존재를 가두는 동시에, 봉인 해제를 막기 위한 최후의 제어 장치 같았다.
“단우 님! 저기! 벽화의 핵심! 저 봉인 진법의 정수가 저곳에!” 청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이미 그림자 괴수들이 그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구체는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이질적인 빛을 내뿜었고, 그 안에서 스멀스멀 거대한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잔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순 없어. 단우는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해도, 그는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나뿐이야….” 단우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검 끝이 떨렸다. “저 봉인 진법의 정수를… 부숴야 해. 아니면… 저 구체를 완전히 파괴하든가.”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검은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에 그들의 몸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그리고 이 세상의 운명은, 이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검은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거대한 어둠의 존재가 마침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가운 악의가 공간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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