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뿌리
고요는 더 이상 평화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였고, 폐허가 된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침묵이었다. 아크라이트 마법 학원의 높다란 성벽 너머, 황량한 대지는 붉은 먼지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라난 기형적인 괴물들. 그리고 그 괴물들이 쏟아내는 마력핵을 쟁취하기 위해 매일같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 마법 학원 생도들.
“젠장, 또 꽝이잖아!”
강현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손에 든 마력 탐지기가 가리키는 곳은 그저 텅 빈 고철 더미뿐이었다. 며칠째 수색했지만, 제대로 된 마력핵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학원으로 돌아가면 또 배급량이 줄어들 테지. 벌써 며칠째 딱딱한 건빵과 맹물로 버티고 있었다. 생존자들의 마지막 보루라 불리는 아크라이트 학원도, 이젠 그저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허리춤에 찬 통신 마석이 희미하게 빛났다. 발신자는 수아였다. 평소 같으면 시덥잖은 농담이나 건네올 녀석이건만, 수아의 목소리는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 강현! 어디야? 대박이야, 진짜… 상상도 못할 걸 찾았어! 학원 지하… 금서고 뒤편에 숨겨진 그 문 말이야!
강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학원 지하 깊은 곳, 봉인된 문. 오래된 소문으로는 학원 설립자들이 미쳐버린 고대 마법 연구를 진행하던 곳이라 했다. 교사들은 호기심 많은 학생들의 입을 막기에 급급했지만, 수아는 언제나 그런 금기를 찾아 헤매는 데 도가 튼 녀석이었다.
“수아, 너 또 그 쓸데없는 소문 좇아다닌 거야? 위험하다고 했잖아.”
— 아니, 아니야! 이건 소문이 아니야. 직접 봤어! 믿을 수 없어… 학원이 이걸 숨기고 있었다니… 빨리 와줘, 강현. 혼자선 무리야. 뭔가… 뭔가 살아있어!
수아의 목소리는 갑자기 끊겼다. 송신 마법의 불안정한 연결 탓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강현의 심장을 짓눌렀다. ‘살아있어’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강현은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젠장, 쓸데없이 모험심 강한 친구를 둔 죄였다. 서둘러 학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붉은 노을이 폐허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
학원으로 돌아온 강현은 곧장 수아의 방으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책상 위의 서류와 마법 장치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침대 시트는 한쪽으로 걷어져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혹은 강제로 방을 뒤진 흔적이었다.
“강현! 너도 수아 못 찾았어?”
복도에서 지혁이 달려왔다. 지혁은 수아와 강현의 오랜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였다. 덩치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흙 마법을 다루는,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역력했다.
“방이 엉망이야. 수아가 뭔가 발견했다고 통신을 보냈는데… 갑자기 끊겼어.”
강현은 바닥에 흩어진 종이 조각들을 주웠다. 낡은 고문서의 사본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 그리고 학원의 지하 구조도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구조도에는 ‘금서고 뒤편’이라고 표시된 지점에 붉은 펜으로 굵게 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섬뜩한 필체로 ‘뿌리…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쓰여 있었다.
“뿌리? 이게 대체 뭐야?” 지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수아는 저곳에 갔다는 거야. ‘살아있다’고 했어.”
지혁의 눈이 커졌다. “그 금지된 지하 말이야? 미쳤군. 교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막는 곳인데… 수아는 결국 사고를 쳤군.”
“사고가 아니라 위험이야.” 강현이 말했다. “수아는 단순한 장난을 치는 애가 아니야. 뭔가 중요한 걸 발견했고, 그래서 사라진 거야.”
두 사람은 망설일 틈도 없이 지하로 향했다. 금서고는 학원 지하 3층에 위치해 있었다. 고대 마법서와 금지된 지식들이 잠들어 있는 곳. 낡은 철문은 늘 굳게 잠겨 있었지만, 수아는 문따기 마법에 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횃불 마법으로 어둠을 밝히자, 끝없이 이어지는 책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아의 발자취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마법서들이 흩어져 있고, 책장 사이로 구불구불한 잉크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쥐가 파놓은 길처럼.
가장 안쪽, 폐쇄된 듯한 서고의 뒷부분에 이르자 거대한 석벽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그저 낡은 벽이었지만, 강현은 그곳에서 희미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봉인 마법. 그것도 아주 강력한.
“수아가 이걸 어떻게 열었지?” 지혁이 중얼거렸다.
“혼자 연 게 아닐 거야.” 강현은 석벽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리고 벽의 한 귀퉁이에서, 손톱으로 긁힌 듯한 작은 흠집을 발견했다. 그 흠집 안에는 수아의 마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옆으로는 핏자국처럼 번진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 수아를 돕거나, 아니면… 강제로 끌고 간 건가.”
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강제로? 학원 안에 그런 놈이 있다고? 교사들 몰래?”
“수아가 발견한 게 학원의 금기라면, 교사들이 모를 리 없어.” 강현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어쩌면 교사들 중 누군가가….”
소름이 돋는 섬뜩한 추측이었다. 강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석벽을 감싸고 있는 봉인 마법은 복잡했지만, 수아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끝에서 마력이 응축되었고, 조심스럽게 봉인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콰직!**
귀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석벽 중앙에 거대한 틈이 벌어졌다. 그 너머에는 어둠뿐이었다. 횃불 마법의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군.” 지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어. 수아를 찾아야 해.”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틈새는 좁은 통로로 이어졌고, 통로는 이내 가파른 나선형 계단으로 변했다.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공기 중에는 묘한 비릿함과 함께 기분 나쁜 마력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일반적인 마력과는 다른, 불쾌한 종류의 에너지였다. 마치 생명력을 갉아먹는 듯한, 음습하고 끈적한 기운.
몇 시간을 내려갔을까. 그들은 고대 유적의 잔해 같은 곳에 도착했다. 금이 간 벽돌과 무너진 아치형 구조물. 이곳은 한때 번성했던 고대 문명의 유적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지어진 곳일까.
“수아!” 강현이 나지막이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벽면 곳곳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양들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덩굴과 뿌리 모양이었고, 중앙에는 사람의 심장처럼 뛰는 듯한 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뭔가 기분 나빠.” 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마법은 처음 봐.”
강현도 동감했다. 그 어떤 금지된 마법서에서도 본 적 없는, 존재 자체로 끔찍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문양들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수아의 마법 지팡이를 발견했다.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이는 지팡이 끝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통로는 점점 넓어졌고, 마침내 거대한 동굴 같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동굴 중앙에는 마치 거대한 살아있는 심장처럼, 어둡고 붉은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거대한 뿌리처럼 엉켜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거대한 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뻗어난 뿌리들은 그 자체로 끔찍한 생명체 같았다.
뿌리들은 불규칙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맥동에 맞춰 홀 전체에서 희미한 울림이 느껴졌다. 단순히 마력의 진동이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생명이 고통받는 듯한, 무수한 비명 소리의 잔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강현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보았다.
뿌리들 사이사이, 거대한 줄기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간의 형상들이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듯 움직이고 있었지만, 눈은 이미 풀려 있었고, 몸은 뿌리들과 하나가 된 것처럼 기괴하게 변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 아직 형태가 완전히 변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강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수아…!”
지혁의 절규가 홀에 울려 퍼졌다. 뿌리 속으로 천천히 흡수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수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마지막까지 뭔가를 말하려는 듯한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는, 얇은 종이 조각 하나가 겨우 매달려 있었다.
강현은 용기를 내어 뿌리로 다가갔다.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기운이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듯했다. 하지만 수아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종이 조각을 겨우 잡아챘다.
거기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수아의 마지막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_이건… 학원의 심장이야. 우리가 쓰는 마력의 근원. 괴물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것의 시작. 우리… 우리가 제물이었어…_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순간, 거대한 뿌리 덩어리가 마치 숨을 쉬듯 크게 요동쳤다. 뿌리 사이로 짓눌린 수아의 몸이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뿌리 가장 깊은 곳에서, 섬뜩할 정도로 밝은, 검붉은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강현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군.”
뒤를 돌아보니, 낡은 로브를 걸친, 늘 온화한 미소를 띠던 학원장 에라스무스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온화함 따위는 없었다.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강현과 지혁을 짓눌렀다.
“아크라이트 학원의 ‘잊혀진 뿌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금기란다. 모든 것은 학원의 생존을 위해서…”
에라스무스의 손끝에서 강력한 봉인 마법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강현은 보았다. 뿌리 속에서 기형적으로 꿈틀거리는 또 다른 생명체들의 그림자를.
학원이… 이 끔찍한 뿌리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괴물을 통해 세상의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그 괴물들의 마력핵을 회수하여 다시 이 뿌리를 먹여 살리는, 거대한 순환 고리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연료는… 학원 생도들을 포함한, 인간의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아니야…!” 강현이 절규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한 진실.
에라스무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파멸된 세상의 생존 방식이란다. 이제 너희도… 이 위대한 순환의 일부가 될 시간이다.”
뿌리가 거대한 입을 벌리듯 크게 요동치며, 강현과 지혁을 향해 뻗어오는 무수한 촉수들을 토해냈다. 그들은 도망칠 곳 없는, 심연의 먹이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