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마법학교, 명문 아르카나 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마법계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곳. 졸업생들은 각국의 마탑과 마법부의 핵심 요직을 꿰찼고,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곧 성공 가도를 예약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여기, 그 화려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간당간당한 성적으로 학사 경고를 피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 이슬비였다.
“이슬비! 또 공간 왜곡 주문을 이렇게 난잡하게 쓰는 학생은 너밖에 없을 거다!”
마법 증발 수업 시간, 내 마법은 오늘도 나를 배신했다. 마법진이 증발해야 할 증발포션 대신, 교수님의 콧수염이 사라질 뻔했고, 조교의 앞머리는 마치 누군가 날카롭게 잘라낸 듯 일자로 정돈되어 버렸다. 강의실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그 중심에는 늘 내가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아무래도 마력 제어가… 오늘 아침에 빵을 너무 급하게 먹어서….”
나는 변명이라고 내뱉은 소리에 나 자신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교수님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마를 짚었다. “이슬비, 너는 오늘 방과 후 학원 지하 자료실 정리를 맡아라. 특별 봉사 활동이다. 다음 학사 경고는 더 이상 구제해 줄 수 없어.”
자료실 정리? 그건 명문 아르카나 학원의 악명 높은 벌칙 중 하나였다. 학원 지하 자료실은 미로 같고, 먼지투성이이며, 종종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법 잔향 때문에 섬뜩한 기분마저 드는 곳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다섯 번째인가?
수업이 끝나고, 나는 터덜터덜 지하 자료실로 향했다. 무겁고 육중한 철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촛불 지팡이로 주위를 밝히며 걷는데,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설마 귀신이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중얼거리며 책들을 정리하는데, 이상한 마법 잔향이 느껴졌다. 내 마력은 제멋대로일지언정, 마법 잔향을 감지하는 능력만큼은 타고났다는 평을 듣곤 했다. 이건… 뭔가 다르다. 흔히 쓰이는 마법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되고, 강렬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미묘하게 발랄한 기운.
나는 홀린 듯 그 기운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오래된 책장들이 빼곡히 들어찬 미로를 지나자,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 문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문틈으로 섬광처럼 빛나는 기운이 새어 나왔다.
“여긴 또 뭐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에 손을 댔다. 순간, 내 손바닥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봉인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었다! 내 손에서 마력이 제멋대로 흘러나와 봉인에 간섭하고 있었다.
“안 돼! 멈춰, 이 바보 같은 마력아!”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법은 점점 강해졌고, 이윽고 봉인 마법진이 ‘파직!’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며 서서히 열렸다.
문 안쪽은 어두컴컴한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호기심이 공포심을 압도했다. 촛불 지팡이를 높이 들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통로 끝에는 넓은 동굴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은 기묘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흐읍!”
그곳에는 거대한 애벌레… 아니, 꿈틀거리는 무언가들이 있었다. 몸통은 반투명하고 무지개색으로 빛났으며, 크기는 어린아이만 했다. 마치 거대한 젤리처럼 꾸물거리는 그것들은 동굴 벽에 박혀 있었고, 주기적으로 몸을 뒤틀 때마다 동굴 전체가 울리는 듯한 마법적인 진동을 뿜어냈다. 진동의 여파로 작은 마법 결정들이 동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 이게 대체… 뭐야….”
내가 넋을 잃고 꿈틀거리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거기 누구냐!”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칼, 차가운 푸른 눈동자. 그리고 이 아르카나 학원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완벽주의자’ 류서진이었다.
“류… 류서진 선배님?”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늘 칼날 같은 날카로움과 얼음장 같은 냉기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이슬비?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이곳은 금지된 구역이다. 당장 나가!”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동시에 미묘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저… 저는 그냥… 교수님이 시키셔서 자료실 정리하다가… 봉인이 깨져서….”
나는 얼버무리며 변명했다. 그의 시선은 꿈틀이들을 향해 있었고, 이내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선 비난과 경고가 동시에 읽혔다.
“네 엉터리 같은 마법이 또 사고를 친 건가? 이곳의 봉인 마법은 최상급 마법사 열 명이 붙어도 쉽게 해제하지 못하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 마력이 저런 엄청난 봉인을 풀었다고?
“선배님, 저게 대체 뭐예요? 이 꿈틀거리는 것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서진은 한숨을 쉬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묻지 마! 그리고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이곳은 학원의 가장 끔찍한 금기다. 그 어떤 학생도 이곳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돼!”
그는 나를 끌고 나가려 했지만, 나는 버텼다.
“끔찍한 금기라구요? 저기, 서진 선배님, 자세히 보면 얘네들… 좀 귀엽지 않아요? 무지개색으로 반짝거리는 게… 마치 젤리 같고….”
나는 꿈틀이들 중 가장 작고 반짝이는 하나를 가리켰다. 꿈틀이는 내 말에 반응하듯 몸을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파르르 떨리더니, 허공에 작은 마법 불꽃들이 톡톡 터지듯 피어났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귀엽다니! 이 역겨운 것들이야말로 학원의 수치고, 가장 끔찍한 비밀이다! 이 녀석들이 내뿜는 불안정한 마력 때문에 학원 전체의 마력 흐름이 수시로 뒤틀리고, 고위 마법사들은 이 마력을 ‘정제되지 않은 불결한 것’으로 취급해. 학원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존재라고!”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 마력은 뭔가 특별한데요? 정제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강렬하고, 다채로운 느낌이 들어요. 마치… 자유로운 영혼 같달까?”
내 말에 서진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완벽하게 정제된 마법만 추구하는 그에게 내 말은 이해하기 힘든 소리였을 것이다.
“하… 하찮은 소리. 이슬비, 넌 아무것도 모른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학원은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될 거야. 명문 아르카나가 겨우 이런 원시적인 마력 생명체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누가 인정하겠어!”
그의 말에서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는 학원의 수호자였고, 이 금기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듯했다.
그때,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꿈틀이들이 일제히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동굴 벽에 박힌 마법 결정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런, 마력 불안정 현상이 또!” 서진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동굴 전체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선배님, 위험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서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와 함께 바위들이 쏟아지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서진은 손을 뻗어 방어 마법진을 펼쳤지만, 꿈틀이들이 내뿜는 예측 불가능한 마력 때문에 마법진은 파르르 떨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했다.
“젠장! 이 녀석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혹시… 뭔가 무서운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 얘네도 뭔가에 놀란 것 같아요!”
나는 불안정하게 꿈틀거리는 꿈틀이들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한 꿈틀이가 서진이 펼친 방어막을 뚫고 빛나는 체액 같은 것을 뿜어냈다. 그 체액은 서진의 손에 닿는 순간,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연기가 피어났다.
“크윽!”
서진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등에 붉은 반점이 돋아났다.
“이… 이건 마력 과부하!”
꿈틀이들이 불안정하게 방출하는 마력이 너무 강해, 마법사에게 직접적으로 닿으면 마력 과부하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선배님!”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동굴은 여전히 흔들렸고, 꿈틀이들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러다간 동굴 전체가 무너질 판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학원 전체가 위험해질 거야. 이 녀석들의 마력을 안정시켜야 해….”
서진은 아픔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방어막을 펼치려 했지만, 그의 손은 이미 마력 과부하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선배님, 제가 뭔가 해볼게요!”
“너? 네 엉터리 마법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그의 비난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틀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마력은 혼돈 그 자체였지만, 어딘가 내 마력과 비슷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쉬이이… 괜찮아, 괜찮아….”
나는 꿈틀이들 중 가장 크게 몸부림치는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서진은 경악하며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흘러나와 꿈틀이의 반투명한 몸에 닿았다.
‘찌이잉…’
내 마력과 꿈틀이의 마력이 부딪히는 순간, 강력한 진동이 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폭발이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내 마력이 꿈틀이의 마력과 섞이며 부드럽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 마력은 항상 제멋대로였지만, 오늘은 신기하게도 꿈틀이의 마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마치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 듯이, 내 마력이 꿈틀이의 혼란스러운 마력을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어…?”
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꿈틀이들의 몸부림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빛깔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격렬한 진동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떨림으로 바뀌었다. 동굴의 흔들림도 멈췄다.
“이게… 대체 어떻게….”
서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꿈틀이에게서 손을 떼고 미소를 지었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끼리는 잘 통하나 봐요. 저도 마력 제어가 잘 안 되는 편이라서… 오히려 얘네들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죠.”
내 말에 서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혼란, 경이로움, 그리고… 미묘한 감탄이 뒤섞여 있었다.
“네가… 금기를 다스린 건가?”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날카로움을 잃고, 낮고 조용했다.
그 후로 우리의 관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학원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엉터리 마법사’ 이슬비로 알았지만, 류서진 선배님은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나를 은밀하게 지하실로 불러내 꿈틀이들의 상태를 함께 확인하곤 했다.
“오늘은 꿈틀이들이 약간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학원 상층부에서 대규모 마법 실험이 있었으니, 아마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내가 꿈틀이들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면, 서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기록했다. 그는 더 이상 꿈틀이들을 ‘역겹고 불결한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네 말이 맞군. 네 마력은… 이 녀석들과 공명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어느 날,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꿈틀이들을 넘어, 나에게 와닿았다. 그 시선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는 그저… 얘네들이 안쓰럽게 느껴져서요. 모두에게 외면받고, 끔찍한 금기라고 불리면서 여기에 갇혀 있는 게….”
나는 꿈틀이의 반투명한 몸을 쓰다듬었다. 꿈틀이는 내 손길에 반응하듯 부드럽게 몸을 뒤틀었고, 주변에 작은 마법 결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슬비.”
서진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금기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네가 처음으로 알려줬어.”
그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얼음 같던 눈동자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네 엉터리 마법이 가끔은… 가장 강력한 마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그의 칭찬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선배님은요? 선배님은 언제나 완벽하고 냉철한 분인 줄만 알았는데….”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서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갇혀 있었을 뿐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의 진실도, 내 안의 다른 면도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그 순간, 거대한 꿈틀이 하나가 우리 사이로 몸을 쑤욱 내밀었다. 마치 우리 대화에 끼어들려는 듯, 녀석의 몸에서 반짝이는 마법 결정들이 흩날렸다. 그 결정들은 허공에서 하트 모양으로 변하더니 ‘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하하! 얘네도 우리를 응원하는 건가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서진도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내가 처음 봤던 차가운 완벽주의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인간적인, 따뜻한 웃음이었다.
“글쎄… 이 녀석들은 가끔 이렇게 엉뚱한 마법을 만들어내곤 하지. 예측 불가능해서 더 곤란하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엉뚱함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지하 깊숙이 숨겨진 끔찍한 금기, 꿈틀이들. 그리고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된 우리 둘. 이 기묘한 인연이 앞으로 어떤 마법 같은 로맨스를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혼자서 학사 경고를 피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든든한 ‘금기 수호자’이자, 어쩌면 나의 첫 ‘마법 같은’ 연애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류서진 선배와 함께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 확신했다. 내 엉터리 마법도, 가끔은 이렇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