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하늘이 늘 잿빛으로 드리워진 어둠골.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한율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 일생에 한 번쯤은 꿈꾼다는 ‘천하제일 무술대회’의 최종 결전지.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설렘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웠다.

“어서 오십시오, 운검문 소년협 한율.”

경기장 입구에서 그를 맞은 건 천무문의 장로, 백영이었다. 희끗한 수염 너머로 빛나는 백영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한율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장로님.”

“아니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도착했지. 자, 들어가시오. 모두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

백영은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한율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둠골 안쪽의 경기장은 거대한 원형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절벽은 검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절벽 사이사이에는 기괴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무늬는 언뜻 보면 고대 문양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뱀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들이 뒤엉켜 형언할 수 없는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음침하군….”

한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비친 경기장은 마치 거대한 제단을 연상케 했다. 관중석은 이미 강호의 명망 높은 문파들과 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열기에 차 있었으나, 그 열기 속에는 알 수 없는 광기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경기장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었다. 검은 화강암으로 깎아 만든 비석에는 금색으로 ‘천하제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이번 대회의 마지막 8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맨 아래에는 한율의 이름, ‘운검문 한율’이 선명했다.

“한율 소년협!”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오랜 동료이자 라이벌인 명문 ‘벽력문의’ 사자, 강태호가 서 있었다. 태호는 늘 그랬듯 호탕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 어딘가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피로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태호! 오랜만이군.”

“그래, 살아남아 올라온 것을 축하한다. 허나, 이제부터는 진짜 지옥이다.”

태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그는 한율의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회가 이상해.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어. 자꾸 이상한 꿈을 꿔. 꿈속에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것 같아. 그리고… 참가자들이 변하고 있어.”

한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변한다고?”

“그래. 눈빛이 텅 비어버리거나, 갑자기 광기에 휩싸여 초식을 난무하는 자도 있었어. 어제 경기를 치른 육합문의 고수 허도진은 이빨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결국 기절했지. 단순한 내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괴해.”

태호의 말은 한율이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백영 장로를 바라봤다. 백영은 미동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천무문의 제자가 징을 울리며 첫 경기를 알렸다.

“천하제일 무술대회, 8강 첫 번째 경기! 천무문의 흑뢰, 곽호와 만선문의 독각귀, 천우진!”

두 고수는 경기장으로 나섰다. 곽호는 천무문의 명성을 잇는 젊은 고수였고, 천우진은 독문 무공으로 악명 높은 만선문의 고수였다. 강호의 이목이 집중된 대결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곽호의 검은 그림자처럼 천우진을 덮쳤다. 그의 초식은 빠르고 맹렬했지만, 한율의 눈에는 이전과는 다른 기묘한 광기가 서려 보였다. 곽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그의 검은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천우진은 독문 무공인 ‘독각술’로 맞섰다. 그의 손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푸른 연기처럼 피어올라 곽호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곽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를 들이마시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이것 봐….” 태호가 낮게 읊조렸다. “곽호의 기운이 이상해. 너무 강렬해. 마치… 그 자신이 독기를 마시고 더 강해지는 것 같군.”

한율도 동감했다. 곽호의 내공은 분명 맹렬했지만, 그 내공의 근원이 일반적인 ‘기’와는 다른 끈적하고 불쾌한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바닥 모를 심연에서 끌어올린 역겨운 힘 같았다.

곽호의 검이 천우진의 가슴을 꿰뚫는 순간, 경기장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곽호는 쓰러진 천우진을 내려다보며 기괴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핏줄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눈은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었다. 마치 인간의 가면을 쓴 다른 존재 같았다.

“곽호 승!”

심판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기장은 열광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한율은 박수 대신 곽호의 표정을 주시했다. 곽호의 입가에는 거품이 맺혔고, 그의 검은 서서히…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 경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한율은 경기를 지켜보면서 태호의 말을 실감했다. 고수들의 무공은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싸우는 도중 환각에 빠져 비명을 질렀고, 어떤 이는 자신의 팔을 물어뜯으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 모든 광경은 강호의 무인들이 추구하는 ‘무’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인간성을 포기한 짐승들의 싸움에 가까웠다.

그날 밤, 한율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에 본 곽호의 눈빛과 그 기괴한 미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침상에 앉아 닫힌 문을 응시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난 한율은 객잔 밖으로 나섰다. 어둠골의 밤은 칠흑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크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별빛은 아름답기보다는 차갑고 무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웃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때, 저 멀리 경기장 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한율은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경기장 상공을 바라봤다. 아까 본 별들이 비정상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가 솟아올랐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한율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건 환각이다. 지쳐서 그런 거야.’

겨우 경기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율은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경기장 중앙의 비석 주변에는 천무문의 장로 백영과 몇몇 고위 제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고대어로 보이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검은 수정 구슬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비석 아래에 쓰러져 있는 것은 곽호였다.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액체로 흥건했고, 살갗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듯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 숨결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곽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그의 몸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백영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차갑고 잔혹한 음성이었다.

“강호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이 세계의 최고봉이라 착각하지. 허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의 ‘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혼’은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가?”

백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율이 숨어 있는 그림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 있었군, 운검문의 마지막 빛. 어서 나오너라. 너도 이 위대한 의식의 일부가 될 시간이다.”

한율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었다. 그는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율의 목소리는 떨렸다. “곽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의식을 치르는 중이지.” 백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천하제일 무술대회는 단순한 무인들의 축제가 아니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위대한 의식이다. 강호의 가장 강렬한 내공과 혼돈을 한데 모아… ‘그분’의 강림을 준비하는 의식!”

백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비석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곽호의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손에 묻혀 자신의 이마에 기괴한 문양을 그렸다.

“‘그분’이라니… 대체 누가?”

“별의 저편에서 오신, 모든 것을 잊게 할 망각의 심연.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태초의 존재!” 백영의 목소리는 광기에 차 있었다. “이 천하제일 무술대회에서 발산되는 무인들의 혼과 내공은 모두 ‘그분’께 바쳐지는 제물이다. 가장 강력한 자의 육체는 ‘그분’의 그릇이 되고, 가장 절망한 자의 혼은 ‘그분’의 양식이 되며, 모든 강호의 ‘기’는 ‘그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한율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대회가… 제물이었다니. 모든 무인들이… 거대한 의식의 부속품에 불과했다니.

“미쳤군요… 당신들은 모두 미쳤어!”

“미쳤다고? 아니! 우리는 드디어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백영은 손짓으로 경기장 상공을 가리켰다. “느껴지는가? ‘그분’의 기운이! 별들이 울부짖고, 심연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한율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아까 보았던 검은 그림자가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그것은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였다. 수많은 촉수들이 뒤엉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무수한 눈동자들이 한율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 눈동자들은 별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이성이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게 다… 계획된 일이었나?” 한율은 중얼거렸다. “이 천하제일 무술대회는 처음부터… 이 의식을 위한 것이었나?”

“그렇다!” 백영은 크게 웃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강호는 스스로의 무공을 닦고, 대회를 통해 우열을 가렸다. 그들의 무공이 깊어지고 내공이 쌓일수록… ‘그분’을 맞이할 준비도 완벽해지는 것이지. 이제 남은 것은… 가장 강렬한 혼돈을 불러일으킬, 최종 승자의 절규뿐이다!”

백영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그리고 그 절규는, 아마도 너의 것이 되겠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영을 포함한 제자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 기운은 곽호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곽호의 몸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대가 변형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이마에서는 뿔이 솟아났고, 등에서는 거대한 날개가 솟아났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끔찍한 괴물이었다.

“자, 운검문의 마지막 검객아. 너의 검으로 이 괴물을 베어라. 너의 모든 기운을 쏟아내라. 네가 이기든 지든, 너의 혼과 내공은 ‘그분’께 바쳐질 것이다!”

괴물로 변한 곽호가 포효했다. 그 포효는 단순한 짐승의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우주적인 공포를 담고 있었다. 한율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그의 눈은 살아남은 마지막 이성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건 무술 대회가 아니다. 이 세상의 운명을 건 싸움이다.’

한율은 자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운검문의 비전은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이루는 검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검 끝에는 자연의 이치조차 거부하는, 심연의 존재가 서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한율의 검이 빛을 발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비정상적인 별빛 아래, 그는 마지막 인간으로서 무모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의 검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둠을 가르는 유성이 되었다. 그 유성이 심연의 존재가 현현한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어둠골의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섬뜩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어둠골은 이전보다 더 깊은 침묵에 잠겼다. 찢어진 하늘은 서서히 다시 닫혔고, 별들의 광기는 이전보다 희미해졌다. 경기장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비석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 잔해 속에서 한율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검은 부러져 있었고,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백영과 천무문의 제자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곽호의 끔찍한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악몽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한율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목도한 자의 눈이었다. 그는 싸움에서 이겼지만, 모든 것을 잃은 듯했다. ‘그분’의 강림은 막았지만, 그 존재에 대한 지식은 이미 그의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강태호가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율! 괜찮은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한율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태호를 꿰뚫는 듯했다. 태호는 그 시선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차가운 공포를 느꼈다.

“태호…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였어.”

한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태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아니야. 저 너머에…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리고… 그들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

태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율의 눈에서 그는 망망대해의 끝을 보았고, 별이 없는 밤하늘의 공허함을 보았다.

“대회는… 끝났어. 천하제일… 재앙으로.”

한율은 부러진 검의 파편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다음 대회를 막아야 해. 다음 제물이 바쳐지기 전에….”

어둠골을 떠나는 한율의 뒷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그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고,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열정으로 빛나지 않았다. 강호는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무승부로 끝났다고 기록할 것이다. 몇몇 고수들이 사라지고 광기에 휩싸였지만, 그저 과도한 내공 수련의 부작용 정도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나 한율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이미 변해버렸고, 그는 그 끔찍한 진실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그의 영혼을 영원히 잠식할 것이었다. 천하의 운명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 망각의 심연은 언제든 다시 문을 두드릴 것이 분명했다. 한율은 그 어둠의 문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둠골을 뒤로하고 그는 잿빛 하늘 아래, 홀로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