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고요는 역설적으로 거대한 소음 위에 쌓여 있었다. 아스팔트와 유리창으로 빼곡한 빌딩 숲, 그 어딘가에 자리한 나의 작은 아파트는 늘 같은 시간에 해를 맞고, 같은 시간에 어둠을 들였다. 유진은 창밖을 응시했다. 무채색 빌딩들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남산 타워는 오늘도 묵묵히 서 있었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모니터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때때로 잊은 듯 찾아오는 공허함을 안고 잠이 드는 것.
오늘은 유독 그 공허함이 짙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마감에 쫓기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여유롭지도 않은 흐릿한 오후. 그녀는 완성된 시안 파일을 전송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딱딱한 의자에 기댄 등은 뻐근했고, 눈은 건조했다. 문득 목이 말라 냉장고로 향하던 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주 희미하고 가냘픈 소리. “야옹.”
유진은 귀를 기울였다. 착각일까?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거실은 늘 그렇듯 고요했다. 창문을 닫아둔 탓에 바깥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또렷하고 조금 더 애절한 소리. “야옹…”
소리는 그녀의 작은 베란다 쪽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베란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겨울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싸늘한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베란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보았다. 난간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작은 그림자를.
새까만 털, 군데군데 흙먼지가 엉겨 있었지만 어딘가 품위가 느껴지는 자태였다. 몸집은 작고 말랐으며, 잔뜩 경계하는 듯한 눈빛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양이였다. 유진의 아파트가 꽤 높은 층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엘리베이터를 탔을 리는 없고, 빌딩 외벽을 타고 왔을 리도 만무했다. 아마도 옆 건물 옥상에서 뛰어넘어왔거나, 층계참을 통해 올라온 후 베란다 난간을 타고 이동했을 터였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갔다. 고양이는 털을 한껏 세우고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잿빛 눈동자는 아직 경계심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간절함이 서려 있는 듯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고양이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배고프니?”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가느다란 목을 한 번 더 늘였다. “야옹.”
그제야 유진은 고양이의 한쪽 발목이 미세하게 부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고양이의 눈높이에 맞춰 마주하자, 검은 털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유진은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라도 하는 것처럼.
유진은 냉장고에 있는 참치캔을 떠올렸다. 먹여도 될까? 길고양이에게 사람이 먹는 음식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 당장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고양이는 여전히 베란다 난간에 앉아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유진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참치캔을 따 작은 접시에 담았다. 물도 한 그릇 떠서 함께 들고 베란다로 돌아왔다.
“여기, 먹어봐.” 그녀는 접시를 고양이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두었다. 고양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허기에 굴복한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게걸스럽게 참치캔을 먹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작은 생명 하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공허한 마음을 아주 잠깐이나마 채워주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순식간에 참치를 비우고 물까지 마셨다. 목마름과 허기가 해결되자, 고양이의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진 듯 보였다. 이제 난간이 아닌, 베란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유진은 고양이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밤이.” 그녀는 고양이의 새까만 털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밤이. 그 순간, 고양이는 놀랍게도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의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고양이는 낯선 손길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유진의 손바닥에 기댔다. 그 순간, 유진은 마치 고양이의 마음속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따뜻하다…
아주 짧고 희미한 속삭임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진은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고양이는 더 깊이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행동은 마치,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단순히 혼자 오래 지낸 사람의 착각일까? 아니면, 이 작은 생명체가 정말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는 다시 한 번 유진의 손을 핥았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고마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선명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확실히, 이 검은 고양이의 마음속 말을 들은 것이다.
유진은 고양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잿빛 눈동자 속에는 이제 경계심 대신 깊은 신뢰와, 어딘가 모르게 이해할 수 없는 연륜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가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너… 나한테 말하는 거니?”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긍정의 표시였다.
유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란다의 싸늘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그녀의 몸은 뜨거웠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상의 권태와 도시의 외로움 속에 잠겨 있던 그녀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길고양이. 그리고 그 고양이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마음속으로. 그녀의 고독한 세계에,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매혹적인 균열이 생겨버린 순간이었다.
밤이, 그 검은 고양이는 유진의 무릎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아픈 다리 때문에 불편해 보였지만, 따뜻한 온기를 나누려는 듯 그녀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그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그녀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이 만남이 앞으로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 이상 그녀의 세상은 어제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