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찢겨나간 살점 위로 부딪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역류했다. 추락하는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등줄기를 꿰뚫은 칼날이 만들어낸 거대한 구멍, 피와 살이 뒤섞여 엉겨 붙은 옷자락,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이 새겨진 배신의 상흔.
카인은 눈을 감았다. 아니, 감을 수 없었다. 감아도 그 얼굴이, 그 눈빛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으니까.
“미안하다, 카인.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제이. 내 유일한 벗. 내 생명보다 더 믿었던 존재.
그는 언제나 흔들림 없는 푸른 눈빛으로 카인을 바라보곤 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검을 잡고, 마물들 틈바구니에서 서로의 등을 지켰으며,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단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었던 나의 형제. 우리는 세상의 끝까지 함께 갈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멸망한 왕들의 무덤 깊은 곳에 봉인된 ‘어둠의 심장’을 찾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심연의 바닥에 처박힌 내 몸처럼 산산조각 났다.
지상에서 불과 몇 십 길 아래, 어둠의 심장이 잠들어 있다는 봉인석을 막 부수고 나왔을 때였다. 비릿한 핏물이 사방에 튀는 가운데, 마침내 손에 넣은 검은 수정이 뿜어내는 기묘한 광채에 홀려 있을 때였다. 기쁨과 안도감에 젖어 제이를 돌아보던 순간, 카인은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칼날을 보았다. 제이의 손에 들린, 늘 카인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던 그 칼날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단과, 이해할 수 없는 집착만이 번뜩였다.
“잘 가라, 카인.”
낮게 읊조린 그 말과 함께, 제이는 카인의 등을 발로 차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둠의 심장을 쥔 카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수정은 허공에서 잠시 빛나다, 제이의 손으로 떨어져 안착했다. 제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그건 미소라기보단… 욕망에 타오르는 광기에 가까웠다.
추락하는 카인의 시야에서 제이의 형상이 점멸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은, 지난 세월 동안 내가 알았던 제이가 아니었다. 가면을 벗어 던진 진짜 악마의 얼굴이었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빛 한 점 들지 않는 나락의 가장 밑바닥으로.
얼마나 떨어졌을까. 몸이 찢겨나갈 것 같았다.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쿵!
거대한 충격과 함께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이었다. 축축하고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 고인 차가운 액체가 찢어진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피였다. 나의 피,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피.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시야는 흐릿하고, 의식은 조각조각 부서졌다.
나는, 여기서 죽는 건가.
평생을 함께하리라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이름 없는 심연의 바닥에서 개처럼 죽어가는 건가.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질척이며,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것 같은 증오였다.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 이런 짓을…
나는 너를 믿었다.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다. 나의 목숨까지도…
“제이…”
피를 토하며 읊조렸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나의 명예, 나의 믿음, 나의 심장, 그리고 나의 미래.
그리고 이제, 나의 목숨까지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응했다.
심연의 바닥에 고여 있던, 끈적하고 차가운 기운이 카인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렸던 힘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아니,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싹트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카인은 눈을 부릅떴다.
죽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복수해야 한다.
그를 찢어발겨야 한다. 그에게 내가 느낀 고통의 만 배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가 얻어낸 어둠의 심장이, 그를 진정으로 파멸시킬 때까지.
차가운 어둠의 기운이 그의 몸속을 휘감고 돌았다. 찢겨나갔던 상처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 올랐다. 부러진 뼈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나는… 살았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 속에서, 카인의 입가에 처절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미소가 아니었다. 지옥의 나락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섬뜩한 웃음이었다.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 카인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제이… 반드시,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 심연의 바름에서,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너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나의 파멸을 선고했던 네 심장에, 나의 칼날을 박아 넣기 위해.
그때까지, 결코 죽지 않으리라.
어둠 속에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깊고, 더욱 거대해졌다.
복수의 서막이, 비로소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