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9화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밤이었다. 지수는 차가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작업실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서울의 겨울밤은 언제나 그랬듯 수많은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지수의 눈에는 오직 희미한 눈발만이 보였다. 가늘게 흩날리던 첫눈이 어느새 제법 굵어져 세상의 윤곽을 부드럽게 지워나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오늘 막 도착한 해외 공모전 합격 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꿈에 그리던 파리에서의 1년 연수 기회. 심장이 터질 듯 기뻤던 순간은 잠시, 기쁨 뒤에는 날카로운 갈등의 파편들이 난무했다. 이 기회를 잡는다면,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삶의 궤도가 완전히 뒤바뀔 터였다. 그리고 그 궤도 위에는, 현우와의 약속이 놓여 있었다.

지수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합격 통지서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단정한 활자로 빼곡한 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그 안에는 그녀의 미래가, 그녀의 오랜 염원이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현우의 따뜻한 미소와 눈송이처럼 포근했던 그 날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었다.

“보고 싶다, 지수야.”

오래전, 손등에 닿았던 그의 숨결과 함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 날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우리는 새하얗게 변한 세상 위에서 서로에게 영원한 약속을 맹세했다. 언젠가 우리의 이름을 건 작은 공방을 함께 꾸리자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눈 내리는 이 길을 영원히 함께 걷자고.

그는 떠났고, 그녀는 홀로 남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악물고 버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돌아왔다. 마치 겨울의 끝에서 피어나는 봄꽃처럼,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기라도 하듯. 하지만 그의 귀환은 그녀에게 새로운 선택의 기로를 안겨주었다.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오랜 꿈이 눈을 떴고, 현실의 새로운 기회는 과거의 약속과 충돌했다.

그때,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아무 예고 없이, 현우였다. 그의 코트에는 젖은 눈송이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두터운 목도리를 풀며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불 켜져 있길래 혹시나 했어.”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지수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현우는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수는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게 뭐야?”

현우가 다가와 통지서를 가볍게 가져갔다. 그의 눈이 합격이라는 단어에 멈추었고, 이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지수의 눈에는 그 미소 뒤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들이 선명하게 읽혔다.

“축하해, 지수야. 정말 잘 됐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아는데…”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축하한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환희보다는 먹먹함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지난 며칠 밤낮으로 고민했다. 함께 꿈꾸었던 미래를 외면하고 홀로 떠나는 선택이 이기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할 자격이 그녀에게는 있을까.

새로운 눈발, 엇갈린 시선

“현우야…”

지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질 말을 찾지 못해 잠시 망설였다. 현우는 통지서를 다시 그녀에게 건네며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창밖에서는 어느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꽃들이 세상을 뒤덮는 모습은 몇 년 전 그 날과 다를 바 없었다.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눈이 왔었지.”

현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등학생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처음 보고, 그때부터 네가 그리는 세상이 궁금했어. 그리고… 언젠가 너와 함께 그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의 목소리에는 아련한 과거가 실려 있었다. 지수는 가슴이 저렸다. 그 모든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떠나간 현우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를 기다리며 홀로 지켜야 했던 약속의 무게.

“네가 파리로 간다면… 우리가 함께 만들기로 했던 그 공방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현우의 질문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지수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질문을 던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어떤 대답도 준비하지 못했다.

“난… 난 그동안 그 약속을 잊어본 적이 없어. 네가 없어도, 네가 없는 이 자리에서 나는 매일매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현우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슬픔과 이해, 그리고 어딘지 모를 포기를 담고 있었다.

“알아, 지수야.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네 꿈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야?”

“네가 얼마나 파리에 가고 싶어 했는지, 난 다 알아. 밤늦도록 그림을 그리고, 외국어 학원에 다니고… 네가 그리는 모든 디자인에는 파리의 자유로운 감성이 스며들어 있었어. 그게 네 진짜 꿈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현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지? 이제야 돌아와서, 이제야 네 곁에 다시 설 수 있게 됐는데… 나는 여전히 너를 보내줘야 하는 걸까 하고.”

지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 차가운 그의 옷깃에서 눈이 녹는 싸늘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현우의 체온이 아니라, 오래전 그 겨울날의 약속이 가져다주었던 따스한 위로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현우야. 그 공방… 우리의 약속…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갈 수는 없어.”

지수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현우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품은 따뜻했지만, 그들의 약속이 만들어낸 간극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버리는 게 아니야. 잠시 미루는 거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지수야. 나는… 나는 여기서 널 기다릴게.”

그의 말은 지수의 가슴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기다리겠다니. 과거의 자신처럼, 홀로 남아 다시 그녀를 기다리겠다는 말인가. 그 말은 지수에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더 큰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창밖의 눈발은 더욱 거세어졌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마치 이 겨울날의 약속이 가진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대변하는 듯했다. 지수는 현우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겹겹이 쌓이는 눈송이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도 복잡한 감정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이 눈꽃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결정이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까.

새로운 눈이 내리는 겨울밤, 두 사람의 엇갈린 시선은 창밖의 세상처럼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날의 약속이 그들을 묶는 끈이 될지, 아니면 각자의 길을 걷게 할 이정표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수의 손에 들린 합격 통지서가 눈발 속에서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