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입과도 같았다. 눅진한 어둠이 서울의 빽빽한 빌딩 숲 사이를 유영했고, 굵은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길게 늘어뜨리며 아스팔트를 적셨다.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듯했고, 그 속에 섞인 희미한 사이렌 소리는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른 거대한 비극의 전조였다.
강하온은 창가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텅 빈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세상의 균열을 읽어내고 있었다. 낡은 재킷 위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의 모습은 길고 가느다랬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예리하게 솟은 콧날,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얇은 입술은 그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더했다. 평범한 대학생 같기도, 깊은 고뇌에 잠긴 철학자 같기도 한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의 손에는 어젯밤 읽다 멈춘 고대 문명에 관한 서적이 들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이 정적을 깼다. 발신자는 ‘이 형사’. 하온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강 군, 자고 있었나?” 이형사의 목소리는 다급함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하온이 관여하는 사건은 늘 경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아니요, 아직.” 하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엉망이네요.”
“엉망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야. 강 군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아주, 아주 골치 아픈 사건이 터졌네. 밀실이야. 완벽한 밀실 살인.”
하온의 눈빛이 미세하게 번뜩였다. 밀실. 그 단어는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마법과도 같았다. 세상의 논리를 비웃는, 불가능해 보이는 완벽한 모순.
“피해자는요?”
“한서진. 예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사람이야. 별난 사람으로 알려졌지. 강남 최고층 주상복합 펜트하우스에서 발견됐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심장을 정통으로 찔렸는데, 문제는… 모든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는 거야. 창문도 전부 닫혀 있었고, 강제로 침입한 흔적도 없어. 경비 시스템도 멀쩡하고.”
“예술품 수집가… 재미있군요.” 하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차가웠지만, 이번만큼은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강남 ‘하늘의 노래’ 펜트하우스 101층이야. 최대한 빨리 와줄 수 있겠나?”
“30분 안에 도착하죠.”
하온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빗속을 헤치며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하늘의 노래’ 주상복합은 이름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건물 외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마치 눈물 같았다. 로비는 이미 경찰 통제선으로 가득했고, 긴장감은 건물을 짓누르는 듯했다. 하온은 경찰들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01층.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세상의 이면을 만나게 될 터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짙은 피 냄새와 특유의 비릿한 철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도에는 이미 여러 명의 경찰과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형사가 하온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밤샘 근무와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주는 피로가 역력했다.
“강 군, 와줘서 고마워. 저쪽이야.” 이형사는 고개를 젓고 거실 쪽을 가리켰다. “내가 지금까지 본 밀실 사건 중에 가장 완벽한 것 같아.”
“완벽하다는 건 없어요, 형사님. 다만 우리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허점이 있을 뿐이죠.” 하온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펜트하우스 거실은 거대하고 화려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창 너머로 빗물에 번져 흐릿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은 중앙에 놓인 시신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한서진은 최고급 페르시아 양탄자 위에 쓰러져 있었다. 눈은 크게 뜨여 있었고, 붉은 피가 그의 상의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의 심장에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혀 있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칼이 아니었다. 흑단처럼 새까맣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마치 오래된 의식용 단검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온은 시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거실을 훑었다. 방 안은 어지럽혀진 흔적도, 격렬한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값비싼 그림들, 유리 장식장 안의 기묘한 조각상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마시다 만 와인 잔.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까?” 하온이 물었다.
“전혀. 현관문은 안에서 이중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었고, 창문은 특수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깨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해. 안에서 잠금장치도 걸려 있었고. 베란다 문도 마찬가지야. 경비 시스템은 틈 하나 없이 작동 중이었고, 이 층은 오로지 한서진만 접근할 수 있는 개인 코드와 지문 인식 시스템으로만 출입이 가능해. 엘리베이터 CCTV에도 수상한 사람은 전혀 찍히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간 흔적이 없어.” 이형사는 좌절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치… 범인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아.”
하온은 아무 말 없이 피해자의 시신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시선은 단검에, 그리고 피해자의 표정에 머물렀다. 죽음의 고통보다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더 크게 깃든 표정이었다.
“단검은 뭡니까?” 하온이 단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뭔지 몰라. 과학수사대에서 감식 중인데, 일단 특이한 재질인 것 같다고만 하네.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
하온은 허리를 숙여 단검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은빛을 띠는 재질은 일반적인 금속과는 달랐다. 표면에서는 미약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듯했고, 그 푸른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동하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그 푸른빛 속에서 미세한 떨림, 일종의 ‘잔여 에너지’ 같은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은요? 원한 관계나 유산 문제 같은 건 없었습니까?”
“물론 조사 중이지. 하지만 이 밀실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게다가 한서진은 워낙 폐쇄적인 사람이라, 집에 손님을 들이는 일도 거의 없었어.”
하온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양탄자에서부터 천장의 정교한 샹들리에까지,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하나하나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쪽 벽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에 멈췄다. 오래된 염색법으로 만들어진 듯한 태피스트리에는 기괴한 문양과 함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하온의 눈에 미세한 것이 포착되었다. 태피스트리 바로 아래, 바닥에 깔린 양탄자 섬유 하나가 미묘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너무나도 작고 사소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법한 흔적. 하온은 무릎을 꿇고 그 섬유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형사님.” 하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 “이 방은 밀실이 아닙니다.”
이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아니, 강 군. 다 봤잖아. 모든 게….”
“이 방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밀실이라고 *믿도록* 설계된 함정이죠.” 하온은 자리에서 일어서 태피스트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태피스트리 뒤쪽 벽면을 손으로 짚어 나갔다.
“이 방에서 누군가는 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죠.” 하온의 시선은 다시 단검에 박힌 푸른빛에 닿았다. 그의 눈에는 그 빛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뒤틀림이 어렴풋이 보였다. 세상의 이치가 살짝 어긋나 있는 듯한, 기묘한 왜곡.
“그리고, 범인은 바로 이 방 안에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이 안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의 말에 이형사를 포함한 모든 경찰의 시선이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채 하온에게 집중되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에서 춤추고 있었지만, 이 거대한 펜트하우스 안에는 한겨울의 서리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평범한 밀실 살인 사건이, 강하온의 등장과 함께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이제 막, 그림자의 서곡이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