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찬 바람이 싸늘하게 스미는 밤이었다. 오래된 나무 기둥마다 빼곡히 박힌 촛불들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불빛은 아란의 마음속 그림자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 쉼터는 고요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밤에는 할머니의 이야기나 강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왔을 텐데, 오늘은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란은 벽에 기대어 앉아 낡은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멍하니 바라봤다. 끓고 있는 건 그저 몇 개의 뿌리채소와 콩 몇 알이 전부인 죽이었지만, 그마저도 귀한 밤이었다. 흑룡 제국이 지난 보름달이 뜨던 날 발표한 새로운 칙령이 마을을 덮친 이후, 모든 것은 더 팍팍해졌다.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제국의 광산으로 끌고 가는 강제 징발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숨을 곳도, 기댈 곳도 없다는 절망감이 모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죽이 다 됐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아란은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였다. 쪼글쪼글한 손으로 나무 주걱을 저으며, 그 늙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의 곁에는 늘 조용히 자신의 칼을 닦던 강이 묵묵히 서서 죽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등에는 활과 화살통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고,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굳건한 바위 같았다.

“할머니, 제가 따를게요.”

아란이 벌떡 일어나 다가가자,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나무 주걱을 넘겨주었다. 따뜻한 솥의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죽을 작은 나무 그릇에 담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희멀건 죽 한 그릇이 겨우 굶주림을 달래줄 뿐이었지만, 그나마 이것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지아는 아직도 저러고 있네요.”

지아는 쉼터 한구석에 펼쳐진 낡은 천 조각 위로 엎드려 있었다. 그 위에는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조악한 마을 지도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지도를 따라 움직일 때마다, 촛불 그림자가 벽에 춤을 추듯 일렁였다.

“새로운 징발 대상 명단을 입수하려 하고 있단다.”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제국 관리의 숙소에 잠입해서 가져오려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겠지.”

아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국 관리의 숙소는 항상 경비병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곳이었다. 섣불리 들어갔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다.

“너무 위험해요, 할머니. 지아는 아직 어린데….”

“어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에 묶여 있으니.”

할머니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제국의 폭정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어린 지아도, 묵묵히 칼을 닦는 강도, 그리고 쭈그려 앉아 죽을 뜨는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쉼터 입구 쪽에서 덜컹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강은 이미 손에 칼을 움켜쥔 채 몸을 낮췄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란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경비병인가? 아니면 굶주린 들짐승?

지아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서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횃불처럼 번뜩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마세요.”

지아는 속삭이듯 말하며 마치 한 마리 그림자처럼 쉼터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얇은 천막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만이 그녀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죽 그릇을 든 아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나 지아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혹시나 이곳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길고 긴 몇 분이었는지, 아니면 겨우 몇 초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쉼터 입구에서 다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그리고 천막이 살짝 들리며 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얇게 접힌 종이 뭉치를 든 채였다.

“찾았어요.”

지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쉼터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고, 아란은 그제야 굳게 닫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지아는 할머니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다. 할머니는 촛불 가까이 종이를 가져가 돋보기로 조심스럽게 내용을 살폈다. 빽빽하게 쓰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할머니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이런….”

할머니의 낮은 탄식에 모두의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명단이 세 배로 늘었구나. 게다가… 어린아이들의 이름까지 이렇게 버젓이 적혀 있어. 심지어 마을의 가장 어린 막내, 연이의 이름도….”

아란의 손에서 들고 있던 죽 그릇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희멀건 죽이 나무 바닥에 흥건하게 번져나갔다. 막내 연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그런 아이까지 흑룡 제국의 탐욕스러운 손아귀에 끌려간다는 사실이 아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아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 작은 몸은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아란의 목소리가 쉼터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할머니는 아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구나. 차가운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와도, 우리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단호한 목소리가 쉼터의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아란은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 속에서 어렴풋이 아주 오래전, 이 땅을 지켜내고자 했던 작은 반란의 불씨가 다시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꽃이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아란의 가슴을 때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할머니?” 아란이 굳게 결심한 눈빛으로 물었다.

할머니는 낡은 지도가 펼쳐진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길을 막아야 한다. 더 이상의 아이들이 제국의 먹이가 되게 할 수는 없어.”

할머니의 손가락 끝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