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심연의 서곡
“흐읍… 흐읍… 미나야, 좀만 더!”
낡은 도서관 서고의 퀴퀴한 먼지 냄새는 김미나에게 익숙한 공기였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창 없는 공간. 높이 솟은 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찬 낡은 책장 사이에서 미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릎을 굽혔다. 손에는 어른 팔뚝만 한 두께의 고서가 들려 있었다. 학교의 오래된 건물만큼이나 연식이 된 도서관 사서 할머니의 심부름이었다.
“할머니, 이거 정말 여기 꽂는 거 맞아요? 색인에는 없던데요.”
미나는 고서의 표지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닳고 닳아 문드러진 가죽 표지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와, 마치 별자리를 형상화한 듯한 기이한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도서관 깊숙한 곳,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에서 꺼내온 책이었다.
“으음, 그건… 그게 말이다. 아주 아주 옛날에 우리 학교 지하에서 발굴된 거라고 했나? 아무튼, 쓸데없는 건 아니고, 그냥 옛 기록들이 들어 있는 모양새더라. 그쪽 섹션으로 옮겨두는 게 좋을 게다. 아무도 안 보겠지만.”
할머니는 늘 그랬듯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안경 너머로 흐릿한 눈을 깜빡였다. 미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신화 및 고대 기록’이라고 삐뚤빼뚤 쓰인 팻말이 걸린 코너로 향했다. 그곳은 다른 코너들보다 훨씬 더 어둡고 고요했다. 마치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정적 속에서, 미나는 조심스럽게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낡은 나무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순간이었다. 미나가 지정된 칸에 책을 꽂아 넣으려는 찰나였다. 책의 표면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이 갑자기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미나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펜던트가 마치 거기에 반응이라도 하듯 차가운 은색으로 섬광했다.
“어…?”
미나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가 아주 어릴 적, 첫 생일에 선물해 주셨던 평범한 장난감 펜던트였다. 은빛 달과 별이 새겨진 단순한 디자인.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나의 심장 박동에 맞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서의 빛은 미나의 펜던트를 중심으로 더욱 강렬해졌다. 빛은 책장 사이의 어둠을 헤치고, 저 멀리 다른 책장으로 향했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미나는 홀린 듯 펜던트의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낡고 삐걱이는 책장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었고, 빛은 그 길을 지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먼지 쌓인 서고의 끝, 벽에 다다랐다.
“이게… 뭐지?”
벽은 다른 책장들과 다를 바 없이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펜던트의 빛이 가장 강하게 쏟아지는 곳은, 마치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듯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가장 낮은 칸의 책이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보다 훨씬 크고 두꺼웠으며, 표지에는 조금 전 미나가 들고 있던 고서와 거의 흡사한, 하지만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별자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리고 책을 든 순간, 미나의 펜던트가 다시 한번 강렬하게 빛났다. 동시에,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장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묵은 먼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미나는 기침을 콜록이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미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벽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조 문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 오랜 세월에 닳고 닳은 문에는 희미하게나마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펜던트의 문양과 흡사한 거대한 별자리가 음각되어 있었다. 미나가 들고 있던 책과 펜던트의 빛이 문을 향해 쏟아지자, 문 중심의 별자리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잉-**
금속 마찰음과 함께 묵직한 석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미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 너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미나의 뺨을 스쳤다. 마치 수백 년간 봉인되어 있던 숨결처럼.
미나는 망설였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미나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사서 할머니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선생님에게? 하지만, 미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이 펜던트, 이 책, 그리고 이 문.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미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가봐야겠어.”
그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한 발, 한 발. 어둠 속으로 내딛는 순간, 미나의 펜던트가 다시 한번 밝게 빛을 발했다. 빛은 미나의 몸을 감싸 안았고, 낡은 도서관 서고는 눈부신 섬광으로 가득 찼다.
순식간이었다. 은빛 펜던트가 부서져 내리듯 빛의 입자들로 흩어졌다가, 다시 미나의 몸에 달라붙었다. 낡은 교복 대신 순백의 드레스와 함께 푸른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갑옷이 미나의 어깨와 가슴을 감쌌다. 긴 생머리 위로는 은은한 광채를 띠는 머리띠가 얹혔고, 손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발끝까지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은 미나의 움직임에 따라 유려하게 휘날렸다.
미나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을 담은 듯 깊은 푸른색으로 변했고,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 없는 단단한 결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고등학생 김미나가 아니었다. 어둠을 밝히는 존재, 빛의 수호자.
**쉬이이잉-**
손에 쥐인 지팡이 끝에서 빛의 구슬이 피어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밀어내며 빛의 구슬은 문 안쪽으로 나아갔다. 빛을 따라 들어간 곳은 거대한 지하 통로였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양쪽 벽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기이한 문양과 벽화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잊힌 시대의 숨결이 그대로 보존된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습했지만, 묘하게 상쾌했다. 미나의 시선이 빛을 따라 저 멀리 향했다.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빛의 구슬이 닿지 않는 저 너머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는 미나의 심장을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곳이….”
미나는 숨을 들이켰다. 수백, 아니 수천 년 동안 세상에 잊혀 있던 고대 문명의 유적. 이곳에 대체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을까. 빛의 지팡이를 든 미나의 눈동자가 어둠 속을 꿰뚫듯 빛났다.
알 수 없는 모험의 서곡이,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