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번째 복도, 스물두 번째 문: 균열
밤이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분주한 빛으로 넘실거렸지만, 미나의 오피스텔 창밖 풍경은 늘 그 빛의 파편들 중 일부만을 무심하게 담아낼 뿐이었다. 고층이라 시야는 막힘이 없었으나, 정작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듬성듬성 불 켜진 빌딩 숲과 그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강물 뿐이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미나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가방을 내던지듯 소파에 던져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른 샤워하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싱크대에서 컵을 꺼내려는데, 손끝에 닿는 유리잔의 감촉이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냉기가 감도는 부드러운 곡선이었을 텐데, 오늘은 어딘가 모르게 미지근하고 끈적이는 기분이 들었다. 미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거지를 게을리 한 적은 없는데. 혹시 설거지가 제대로 안 된 건가? 컵을 들여다보니 깨끗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컵을 내려놓고 새 컵을 꺼냈다. 기분 탓이겠지, 피곤해서.
뜨거운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 거실로 나왔다. 창밖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 막 차 한 모금을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거실 창문 프레임에 걸려 있던 작은 드림캐처가 스르륵,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람도 없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순간 미나의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내려앉았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드림캐처를 봤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하아, 진짜 피곤한가 보다.”
미나는 애써 웃어넘기며 차를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창문은 닫혀 있는데. 난방도 적절히 맞춰져 있는데. 마치 누군가 바로 뒤에서 냉기를 뿜어내는 듯한 느낌에 미나는 몸을 움츠렸다. 소름이 돋아 팔을 문질렀지만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몸을 묻었는데,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는 섬뜩한 소리도 없이 그저 텅 빈 어둠 속으로 문이 스르륵 열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였다. 미나는 눈을 번쩍 떴다. 방문은 분명 닫고 잠들었을 텐데.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어둠 속 문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 밖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 방문이 정말 열려있는지 닫혀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구… 없어요?”
작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쥐죽은 듯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미나는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이 아파트에 혼자 산 지 3년째였다. 그동안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둑이라면 벌써 무슨 소리라도 났을 것이고, 귀신이라면… 설마. 미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과학의 시대에 귀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의 플래시를 켰다. 밝은 불빛이 방 안을 비추자, 방문은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안심이 되었지만,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럼 방금 그 소리는 뭐였지? 착각? 잠결에 꾼 꿈이었나?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미나는 어제 밤의 일을 애써 잊으려 했다. 몽롱한 기분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려는데, 냉장고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이었다. 냉장고 위 선반에 놓여 있던 작은 화분이 스르륵 밀려나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쨍그랑!
“악!”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쿵쾅거려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깨진 화분 조각과 흙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선반의 빈자리였다. 분명 그 화분은 선반 가장 안쪽에 놓여 있었다. 냉장고 문을 닫는 진동만으로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위치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미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화분을 치웠다. 흙먼지를 치우는 내내 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어젯밤의 드림캐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지금 이 화분. 분명 어딘가 이상했다.
며칠이 흘렀다. 이상한 현상은 더욱 빈번하고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방 찬장 문이 혼자 열렸다 닫혔고, 욕실 거울에 김이 서리지 않은 채 손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밤에는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물건들이 제멋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거실에서 쿵, 쿵,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놀라고 두려웠지만, 이제는 왠지 모를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미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상한 일들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친구에게? 가족에게? 누가 믿어줄까. 모두들 “피곤해서 헛것을 본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이사 가는 게 낫겠다”는 말만 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점점 더 고립감을 느꼈다.
어느 날 밤, 미나는 간신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고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작은 액자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액자 속 사진은 흑백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인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액자는 미나의 눈높이까지 떠오르더니, 이내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안 돼!”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있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꿈인가? 하지만 몸은 현실의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거실에서, 아까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미나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는 너무나 선명했고, 그녀의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였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켜 거실을 비췄다. 플래시 불빛이 미끄러지듯 거실을 훑어 지나갔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탁자 옆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액자가 보였다.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흑백 사진 속 여인의 뒷모습이 담긴 액자였다.
액자는 분명 탁자 위에 똑바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액자를 탁자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미나는 액자를 주우려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바닥에 놓인 액자까지 고작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거리는 마치 끝없이 먼 심연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액자를 잡으려는 순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액자 모서리에,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
미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확인했다. 「그」. 이 액자는 오래 전, 아주 작은 앤티크 상점에서 우연히 산 것이었다. 분명 이런 글자는 없었다.
그 순간, 액자 사진 속 흑백 여인의 뒷모습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섬뜩한 느낌에 액자를 놓쳐버렸다. 액자는 바닥에 떨어졌지만, 깨지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찰나, 액자에서 마치 오래된 먼지 냄새 같은, 어딘가 꿉꿉하고 쇠 비린내가 섞인 듯한 기분 나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쿵.*
미나의 등 뒤, 방문이 닫혀 있던 안방에서 분명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주 느릿하고 무거운, 쿵, 쿵.
점점 더 미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발소리였다.
미나는 얼어붙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아니, 돌아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직 등 뒤에서 다가오는 그 발소리만이 현실이었다.
쿵.
쿵.
쿵.
그리고 미나의 바로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미나는 자신을 뒤덮는 끔찍한 공포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속삭임을 들었다.
*「…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