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대회(天武大會)의 마지막 결승전, 그 서막이 오르기 직전의 천무전(天武殿)은 억겁의 세월마저 얼어붙게 할 듯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용 조각상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주석(朱錫) 경기장 한복판에, 두 개의 기운이 거대한 회오리처럼 맞부딪치고 있었다.
한쪽에는 고목처럼 단단하나 거목처럼 우뚝 솟은 백발의 노인, 천뢰검(天雷劍) 백무진(白武震)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은 듯 깊게 파인 그의 얼굴은 이미 희로애락을 넘어선 경지에 달한 듯했지만, 검게 빛나는 두 눈동자 안에는 천하를 가를 듯한 예리한 검기(劍氣)가 번뜩였다. 그의 옆구리에 찬 낡은 검집 속 검은, 아직 뽑히지 않았음에도 경기장을 감싼 보호막을 찢을 듯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으나 그 속에는 폭풍을 품은 듯한 소녀, 파천수(破天手) 련화(蓮花)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얇은 비단옷은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도 아스라이 흔들리는 듯했고, 옥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백무진의 뇌검(雷劍)에 필적할 만한, 파괴적이면서도 신비로운 힘을 머금고 있었다.
두 고수의 존재감만으로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무림 고수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단 한 곳, 운명의 칼날 위에서 위태롭게 춤추는 두 영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 대회의 승자는 단순한 천하맹주(天下盟主)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넘어, 불길한 예언 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천하의 파멸을 막을 유일한 희망이 될 터였다.
긴 정적이 깨진 것은 심판을 맡은 무림 원로의 떨리는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을 때였다.
“자… 자, 이제 결승전을… 시작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진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의 몸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기(氣)는 흡사 거대한 벼락과 같았다.
“흐읍!”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손이 낡은 검집으로 향했다. 스륵,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신(劍身)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천뢰검(天雷劍). 그 이름처럼 검은 천둥을 머금은 듯 푸른빛을 발하며 경기장을 밝게 비추었다. 검이 뽑히자마자, 백무진의 자세가 순식간에 변했다. 허공을 가르는 듯한 한 걸음, 그리고 천뢰검이 한 획을 그었다.
콰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푸른 검기가 번개처럼 련화를 향해 쇄도했다. 그 속도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련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치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거대한 검기가 몸을 덮치기 직전, 그녀의 옥수(玉手)가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우아한 동작이었으나, 그 순간 련화의 주위로 투명한 장막이 생겨났다.
쉬이이익!
검기가 장막에 부딪히자,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경기장 바닥의 굳건한 주석마저 갈라놓았다. 그러나 련화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투명한 장막은 검기의 위력을 완벽하게 흡수하며 부드럽게 흔들릴 뿐이었다.
“오오오……!”
관중석에서 참았던 탄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천뢰검 백무진의 필살에 가까운 첫 일격을 이토록 손쉽게 막아내다니!
백무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상보다 강했다. 아니, 그의 예상 자체를 뛰어넘는 기량이었다. 그는 순간의 당혹감을 감추고 더욱 굳건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검은 다시 푸른빛을 응축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하나의 섬광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의 푸른 뇌전(雷電)이 검신을 휘감으며 거대한 폭풍을 예고했다.
“천뢰쇄파(天雷碎波)!”
백무진이 외치자,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뇌전이 파도처럼 련화를 향해 몰아쳤다. 뇌전 하나하나가 산을 부술 듯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련화는 더 이상 장막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졌다. 파도가 덮치기 직전, 그녀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마치 거대한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기운이 맴돌았다. 연꽃의 꽃잎들이 펼쳐지듯, 그녀의 손이 허공을 향해 펼쳐졌다.
“파천수(破天手)…… 제1식, 연화개문(蓮花開門)!”
그녀의 두 손에서 시작된 기운이 순식간에 거대한 연꽃 모양으로 응축되었다. 그 연꽃은 투명했으나, 그 속에 담긴 힘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뇌전의 파도와 연꽃 기운이 격돌하는 순간, 시공간마저 일그러지는 듯한 거대한 폭음이 천무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앙!
경기장을 보호하던 단단한 보호막이 한계를 맞은 듯 흔들리다 마침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관중석은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일부 무사들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고,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두 고수의 일격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폭풍 같은 기운이 사라진 자리, 경기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백무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천뢰검을 지면에 박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고통의 그림자가 스쳤다.
하지만 련화의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얇은 비단옷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얼굴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욱 깊고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무진 대협…… 노쇠하셨군요.”
련화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칼날 같은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백무진은 고통스러운 기침을 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하하…… 아직, 아니다. 파천수 소저, 그대 역시 모든 것을 보인 것은 아닐 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련화의 몸에서 더욱 강력한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위에 흩날리던 비단옷이 폭풍처럼 펄럭였다. 옥 같은 손끝에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 빛은 점점 더 선명해지며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어디, 그 노쇠한 몸으로 파천수(破天手)의 진정한 경지를 감당할 수 있는지… 보겠어요.”
련화의 눈빛이 마치 심연을 담은 듯 깊어졌다. 그녀의 발밑에서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마치 거대한 연꽃이 뿌리를 내리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 기운은 경기장 바닥을 뚫고 지하 깊숙한 곳까지 뻗어 내리는 듯했다.
백무진의 심장이 전율했다. 저것은 단순한 기공(氣功)이 아니었다. 대지의 기운, 아니, 이 천무전 아래 잠들어 있던 고대의 힘을 끌어내는 주술적인 무공이었다!
련화의 손이 다시 허공을 향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이번에는 연꽃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서 발산된 푸른 기운은 흡사 거대한 용이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고, 그 용의 머리가 백무진을 향해 정면으로 겨누어졌다.
그 순간, 천무전 전체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공기는 무거워졌고, 모든 소리가 먹먹해졌다. 백무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백무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늙은 몸 속, 최후의 기력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이 싸움에서, 그는 결코 패배할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다시 한번 뇌전을 머금으며, 죽음조차 베어버릴 듯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연화 소저… 잘 보거라. 이것이… 천뢰검(天雷劍)의… 마지막 일격이다!”
그의 외침과 함께, 하늘의 먹구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련화의 손에서 거대한 푸른 용이 포효하며 백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백무진은 그 모든 것을 받아낼 듯한 자세로 천뢰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충돌하는 순간, 천무전은 거대한 섬광에 휩싸였다. 빛이 너무 강렬하여 누구도 그 순간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침묵 속에서, 오직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파만이 영겁의 시간을 맴도는 듯했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경기장 중앙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두 고수가 서 있던 자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균열과, 그 균열 속에서 피어오르는 섬뜩한 푸른 기운뿐이었다.
관중석은 다시금 얼어붙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힘겨루기의 대가는… 무엇일까?
천하의 운명은, 대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