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고요했다.
천장이 높은 32평형 아파트. 해질녘의 붉은 노을이 통창을 넘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청운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고요함 속에서 그는 도시의 숨결을 느꼈다. 저 아래 차들이 오가는 소리, 윗집 아이가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완벽한 고립을 추구했다.
수백 년 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지루하고도 격렬한 삶을 뒤로하고, 그는 이곳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름은 ‘김현우’. 서른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
영력은 철저히 봉인하고, 과거의 기억은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다.
평범함.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후우…….”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은 사라지고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그때였다.

`파지직.`

거실 천장의 스탠드 조명등이 짧게 깜빡였다.
청운은 눈을 떴다. 고개를 갸웃했다.
“콘센트 문제인가.”
별다른 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간혹 있는 일이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이번에는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벌떡 일어섰다.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씻어 놓았던 유리컵 하나가 깨져 있었다.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뭐야?”
분명히 식탁 중앙에 두었던 컵이었다. 바람이 불 리도 없는데.
그는 깨진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쓸어 담았다. 손에 힘을 주어 닦으려는 순간, 손끝에 닿는 유리 조각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착각일 리 없었다.
청운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봉인된 영력의 미약한 파편이 그의 온몸을 훑었다.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차가웠다.
명백한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젠장, 이런 곳까지.”
그는 낮게 읊조렸다. 평온했던 그의 아지트가 침범당했다는 불쾌감이 치밀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거실의 텔레비전이 저절로 켜지거나 꺼졌다. 채널이 맘대로 바뀌었다.
닫아둔 방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식료품을 보관하는 찬장 문이 `덜컹`하고 열리더니, 안에 있던 통조림 캔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공포스럽기보다는, 짜증스러웠다.
수천 년을 살아온 선인에게 이런 하찮은 장난은 그저 불쾌한 소음에 불과했다.

청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거실 한가운데 섰다.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희미하게 빛났다. 봉인된 영력의 일부를 해방시킨 결과였다.
아파트 전체에 퍼져 있는 기운을 탐색했다.
탁했다.
그리고, 굶주려 있었다.
“잡귀인가? 아니, 좀 더 음습하고 집요해.”
그는 중얼거렸다. 평범한 잡귀라면 진작에 자신의 기운에 짓눌려 도망갔을 터였다.
이것은 훨씬 강력하고, 어쩌면 `존재` 자체가 불분명한 무언가였다.

`쿵!`

이번에는 침실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청운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침대 위의 이불은 찢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베개는 가구 사이로 내던져져 있었다.
서랍장은 모조리 열려 옷가지들이 쏟아져 있었고, 창문은 완전히 열린 채 거센 바람이 커튼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벽 한가운데.
그의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인, 단풍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조각상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인간 세계로 내려오며 유일하게 가져온, 선계(仙界)의 기운을 담고 있는 물건이었다.
조각상이 박힌 벽에는 검붉은 `얼룩`이 스며들고 있었다.
피 같기도 하고, 썩은 진흙 같기도 한 끈적한 얼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청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의 주먹이 서서히 쥐어졌다. 손등에 핏줄이 울퉁불퉁 솟아났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김현우’로서의 삶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영역, 자신의 안식처를 더럽힌 대가는 혹독해야 했다.

`우우웅……!`

공기 중에서 낮은 진동음이 울렸다.
아파트의 모든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바닥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청운의 몸에서 검푸른 영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봉인된 힘의 억압이 풀리면서, 아파트 전체가 그의 기운에 짓눌렸다.
방금까지 날뛰던 ‘그것’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두려움.
그래,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욱 거칠게 발악하는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와르르르!`

거실 벽면의 액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났다.
천장에서 거미줄처럼 검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마치 거대한 악령에게 포획된 것처럼 일그러졌다.
청운은 침실 한가운데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온몸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벽 안에서, 바닥 아래에서, 그리고 천장 위에서, 마치 거대한 촉수처럼 아파트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강렬한 기운은, 다름 아닌 그의 아파트, 바로 이 `공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아파트`가 병들었다.
`이 아파트`가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아파트`가, 지금 그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청운의 눈이 번뜩 뜨였다.
짙은 금빛 섬광이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왔다.
“네놈의 무덤이 될 거다.”
그가 읊조리자, 그의 몸을 감싸던 검푸른 영력이 마치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유리창이 `파아앙`하고 깨지며 산산조각 났다.
외부의 차가운 바람이 아파트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바람을 타고, 아파트 곳곳에서 들려오던 기괴한 속삭임이 더욱 또렷해졌다.
`나가… 나가…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수백, 수천 개의 목소리가 겹쳐져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나가라`는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굶주린 포효`였다.

청운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중앙에서 작고 푸른 빛의 구슬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은 봉인했던 영력의 `핵`이었다.
`이토록 평범한 공간에서, 나의 힘을 해방해야 할 줄이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파트의 검은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콰앙!`

그때, 거실 바닥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검은 그림자 같은 촉수들이 튀어 올라 그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청운은 가볍게 몸을 뒤로 젖히며 피했다.
푸른 구슬에서 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번엔… 꽤나 골치 아프겠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단순한 잡령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만에 `사냥감`의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위협` 또한 감지했다.

`크르르르…`

아파트의 벽면과 바닥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운은 손안의 푸른 구슬을 꽉 쥐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의 파동이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34층 높이의 아파트가 흔들렸다.
이 밤, 고요했던 도심 속 아파트에서,
인간 세상에 숨어든 선인과, 아파트에 잠든 미지의 존재의 격전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