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흐릿한 어둠 속을 뚫고 창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제의 충격적인 발견 — 낡은 책갈피 속에서 발견된, 이제는 희미해진 민준의 글씨가 적힌 작은 쪽지—는 소라의 심장을 밤새도록 흔들었다. ‘이 눈이 다시 내릴 때, 그 자리에서 꼭 다시 만나자.’ 여섯 단어에 담긴 잊힌 약속이, 그녀의 잠시 잊었던 과거를 강렬하게 흔들어 깨웠다.
소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춤추듯 떨어지는 눈꽃들은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열두 살의 소라와 민준, 낡은 오두막집 뒤편 작은 언덕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았던 그날. 해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맹세했던 어설프지만 진심 어린 약속. 그때는 몰랐다. 그 약속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깊이 묶어두게 될지.
“민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그의 이름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난 십여 년간, 그 이름은 소라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거나, 혹은 애써 외면해야 할 아픈 잔상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이제, 다시 내리는 눈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할머니의 낡은 상자
소라는 몸을 가누기 힘든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이미 작은 난로 앞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계셨다. 창밖의 눈송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의 옆모습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소라의 눈에는 깊은 회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할머니, 그때… 민준이하고 저, 약속했던 거… 기억하세요?” 소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찻잔을 내려놓는 할머니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기억하고말고. 그 약속 덕분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너희 둘의 맑은 눈빛이 아직도 선해.”
소라는 할머니 옆에 조용히 앉았다. “쪽지는… 할머니가 책갈피에 넣어두셨던 거죠? 제가 버리지 못하게요…”
할머니는 말없이 소라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주름졌지만 따뜻했다.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약속이란다. 특히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더더욱.”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너희 엄마 아빠가 갑자기 떠나고, 너 혼자 남았을 때… 민준이가 너를 찾아왔었어. 그 아이도 부모님을 잃고 혼자였지.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시간들이 할머니한테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단다. 하지만… 그때는 너희가 너무 어렸고,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지.”
소라는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는 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셨다. 민준이 갑자기 사라진 후, 소라는 한동안 방황했고 할머니는 그저 소라를 말없이 보듬어주셨다. 그들 사이의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소라에게는 설명되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민준이네 가족에게…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었어.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아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지. ‘약속을 지키러 꼭 돌아올게.’ 그 말이 할머니 가슴에 박혔단다.”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오셨다. 낡고 빛바랜 상자였다. “이 상자 안에는… 민준이가 너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이 있어. 너희가 어릴 때부터 함께 만든 비밀 상자였지.”
잊힌 약속의 조각들
소라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낡은 상자 안에서는 시간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그 안에는 소라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조약돌에 서툰 글씨로 ‘소라♡민준’이라고 새겨진 돌멩이, 어린 시절 둘이 함께 그린 듯한 삐뚤빼뚤한 그림들, 그리고… 작은 은빛 펜던트 하나.
펜던트는 눈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작고 섬세한 눈꽃은 한때 반짝였을 은빛을 잃고 희미해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잃지 않은 듯했다. 소라는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끝에 닿자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라야, 이거 봐! 우리만의 눈꽃 펜던트야! 겨울 눈꽃이 내리는 날,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는 날, 이걸 서로에게 걸어주는 거야!”
“정말? 그럼 우리 절대 헤어지지 않는 거지?”
“응! 이건 우리 둘만의 영원한 약속이야!”
뜨거운 눈물이 소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펜던트는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으나, 그녀의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날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었다. 민준은 이 펜던트를 소라에게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주었으나, 소라가 너무 어렸기에 그 의미를 잊었던 것일까?
그때, 상자 바닥에 깔려 있던 얇은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물건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살짝 구겨진 종이였다. 소라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한 장의 지도였다. 낡은 마을 지도의 한 귀퉁이가 크게 확대되어 있었고, 그 위에 붉은색 펜으로 동그랗게 표시된 곳이 있었다. ‘옛날 오두막 언덕’.
그곳은 바로 소라와 민준이 어릴 적 약속했던, 첫눈 오는 날 다시 만나기로 맹세했던 그 장소였다. 지도의 뒷면에는 짧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눈꽃이 피는 날. 너를 기다릴게. — 민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었다. 현재의 부름이었다. 민준은…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매년 겨울 눈꽃이 내리는 날, 그 언덕에서 소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소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가는 풍경 속에서, 소라의 마음속에서는 강렬한 결심이 피어올랐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그녀를 그 오래된 약속의 장소로 이끌고 있었다.
소라는 코트와 스카프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그녀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민준. 그를 만나야 했다. 그 모든 진실을 확인하고, 잃어버린 시간의 간극을 메워야 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 이제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