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잿빛 비명

메마른 바람이 황량한 대지를 쓸고 지나갔다.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흙먼지가 발목을 휘감았다. 한때 풍요로웠던 이 땅은 아르카디아 제국의 탐욕스러운 손아귀에 짓밟혀 그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류는 눈앞에 펼쳐진 절망적인 풍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의 손에 쥐인 낡은 단검은 차가웠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것은 이 땅을 지배하는 제국의 폭압이었다.

“류 님,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뒤따르던 청년 병사 찬이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찬의 얼굴에는 피로와 불안감이 역력했다. 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랬듯 짧고 단호했다.

“갈 때까지 간다. 제국의 굶주린 이빨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젠 없다. 우리가 직접 길을 내야 해.”

말없이 모두의 시선을 받는 류는 차가운 눈빛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들의 임무는 간단했다. 최근 제국군이 북쪽 교역로를 따라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있었다. 대규모 병력 이동인지, 아니면 다른 불길한 의도가 숨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새벽의 그림자’라 불리는 그들의 작은 반란군은 제국의 눈을 피해 그림자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젠장, 물이 거의 바닥났어요.”

개똥 영감이 툴툴거렸다. 마른 나무껍질처럼 주름진 그의 얼굴에는 오래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허리춤의 물통을 흔들어 보이며 잔량을 확인시켰다. 찰랑이는 소리 대신 공허한 바람 소리만 돌아왔다.

“알고 있다, 영감. 미라, 주변에 시냇물이라도 보이나?”

류의 말에 선두에서 움직이던 미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그림자’에서 가장 날렵하고 눈썰미 좋은 정찰병이었다. 멀리서 날아오는 독수리도 놓치지 않을 만큼 예리한 그녀의 시야에 아직 물줄기는 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저기 뭔가가.”

미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붉은 대지 저 너머에 희미하게 솟아오른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언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평범한 작은 구릉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뭔가 다른 것을 본 듯했다.

“제국군인가?” 찬이 검자루를 꽉 쥐었다.
“아니요. 뭔가… 부자연스러워요. 병력이 움직이는 흔적은 아닌데, 연기 같은 게 보여요.”

미라의 말에 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감은 늘 옳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언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자갈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까 봐 모두 숨을 죽였다.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했던 연기는 짙은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역겨운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썩은 고기 냄새, 그리고… 타는 살 냄새.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뭔지 알겠군.” 개똥 영감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언덕을 넘어선 순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멈췄다. 작은 숲이 우거져 있어야 할 곳은 불에 그슬려 재가 되어 있었다. 앙상하게 남은 나무 그루터기들 사이로 시커먼 잔해들이 뒹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불완전하게 타다 만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주검. 그들은 모두 옷차림으로 보아 근처 마을의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이런… 씨발.” 찬이 헛구역질을 했다. 그의 손에 쥐인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체 더미 주위에는 서너 명의 제국군 병사들이 망루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들을 향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저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보였다.

“이건… 학살이야.” 미라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학살을 감추는 거야.” 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눈은 불타는 강철처럼 이글거렸다. “이들은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군. 증거를 없애는 자들이다.”

그때, 시체 더미 한가운데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아직 살아있는… 한 어린아이였다. 불에 그슬린 작은 손이 희미하게 움직이며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 제국군 병사 하나가 그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무심하게 발로 차서 다시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안 돼!” 찬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순간, 제국군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쪽으로 향했다.
“들켰다! 젠장!” 개똥 영감이 급하게 활을 당겼다.

류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단검이 번개처럼 허리춤에서 뽑혀 나왔다. “흩어져! 아이를 구한다!”

“돌격!” 찬이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미라는 망설임 없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활시위를 당겼다.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가장 가까이 있던 제국군 병사의 목에 정확히 박혔다. 병사는 고통스러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류는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었다. 첫 번째 병사가 그에게 창을 휘둘렀지만, 류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단검으로 그의 목덜미를 그었다. 피가 솟구쳤다. 다른 병사가 검을 뽑아들었지만, 개똥 영감이 던진 작은 단검이 정확히 그의 손목에 박혔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찬은 자신의 검을 휘둘러 불길 속으로 향하려던 병사를 막아섰다. 그의 검은 아직 서툴렀지만, 분노가 담긴 일격은 꽤나 위력적이었다. ‘쨍그랑!’ 하는 금속음과 함께 병사의 검과 찬의 검이 부딪혔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라의 화살이 다시 한번 날아들어 망루 위에서 활을 당기려던 병사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망루 아래로 추락했다. 개똥 영감은 재빨리 숨어들어 근처에 설치될 제국군의 덫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류는 빠르게 움직여 아직 살아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이미 너무 늦었는지, 작은 눈동자만 간신히 깜빡이고 있었다. 류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 작은 몸은 불길에 그슬려 뜨거웠다.

그때, 마지막 남은 병사 하나가 발악하듯 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평범한 제국군 병사가 아니었다. 검술이 제법 날카로웠다. 류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휘둘러야 했다. ‘챙강!’ 류의 단검과 병사의 검이 부딪혔다. 좁은 공간에서 사투가 벌어졌다.

“류 님! 조심해요!” 미라가 소리쳤다.
병사는 류의 어깨를 긁고 지나갔다. 류는 피가 솟는 어깨를 감싸 쥐면서도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병사의 움직임을 읽었다. 병사가 다시 한번 공격해오자, 류는 피하는 척하며 몸을 낮춰 병사의 다리를 걸었다. 병사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류는 아이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단검을 위로 찔러 넣었다.

‘컥!’ 병사의 비명은 짧았다. 그는 류의 품에 쓰러지면서 뭔가를 놓쳤다. 류는 쓰러지는 병사의 손에서 떨어진 양피지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정적만이 남은 불타는 숲에서, 찬은 검을 거두고 헉헉거렸다. 개똥 영감은 쓰러진 제국군 병사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미라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류는 피 묻은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안에는 제국의 인장이 찍힌 지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는 익숙한 지명들이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은… 불과 한 달 전, ‘새벽의 그림자’ 동맹에 합류한 마을들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들 사이사이에 ‘징집’, ‘소각’, ‘재분배’ 같은 잔인한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뭐야?” 개똥 영감이 류의 어깨 너머로 지도를 엿보며 물었다.

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은… 단순히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게 아니었어. 이들은 반란군의 지원 세력을 뿌리째 뽑아내려 하고 있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제국의 것으로 만들 작정이야.”

지도의 한쪽 귀퉁이에는 제국군 고위 사령관의 이름과 함께 간략한 지시가 적혀 있었다.
**”잿빛 비명 계획. 목표는 세 달 내 모든 북부 지역의 민심 말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마라.”**

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잿빛 비명’. 이름 그대로 이 계획은 북부 전역을 잿빛으로 물들일 참혹한 비명이었다. 그들은 겨우 작은 불씨 하나를 껐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이미 거대한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그 불길은 ‘새벽의 그림자’가 피워 올린 작은 희망의 불꽃마저 삼키려 하고 있었다.

“우리… 당장 돌아가야 해.” 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북쪽 하늘을 향했다. 그들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었다.

“서둘러! 제국이… 북쪽 마을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계획이다!”

미라와 찬, 개똥 영감의 얼굴에 절망과 공포가 스쳤다.
그들이 겨우 막아낸 것은 제국의 잔인한 계획 중 한 조각에 불과했다. 제국의 진짜 이빨은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빨은 지금, 그들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시간은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달리고, 또 달리는 것뿐이었다.
아직 피어나는 작은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잿빛 비명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