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의 굉음과 열기 속에서, 류진은 고요한 조종석에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의 심장이 거대한 기갑 ‘비연’의 핵과 하나 된 듯, 쇠와 유압장치, 그리고 영력을 통해 증폭되는 그의 내공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진동이 온몸을 감쌌다. 기갑과 자신이 하나임을, 이 묵직한 강철의 덩어리가 곧 자신의 팔다리이자 오장육부임을 깊이 체감했다.
“자,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무림천하제일 기갑대회 32강전, 그 대망의 두 번째 경기가 드디어 막을 올립니다!”
웅장한 해설자의 목소리가 수만 관중의 함성을 뚫고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두 기갑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
“먼저, 서역 무림의 자존심! 태산파의 강철호 선수, 그의 기갑, ‘철산’입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육중한 외형,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견고함을 자랑하는 압도적인 방어력! 육중한 강철산이 움직이는 듯한 위용! 과연 누가 이 강철 산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류진은 조종석 너머, 경기장 반대편에 우뚝 선 상대를 바라봤다. 붉은색 강철 갑주를 두른 거대한 기갑, ‘철산’.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였다. 그 안에 앉아 있을 강철호는 분명 노련하고 강력한 무인일 터였다. 태산파는 예로부터 단단한 방어와 묵직한 권법으로 무림에 이름을 떨쳐온 유서 깊은 문파였다.
“그리고! 이번 대회 최고의 신예! 비록 무명에 가까우나, 연일 충격적인 승리로 무림을 경악케 하고 있는 주인공! 류진 선수, 그의 기갑, ‘비연’입니다! 기개 넘치는 날렵한 몸체, 마치 한 마리 제비가 창공을 가르는 듯한 민첩성! 과연 이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태산을 흔들 수 있을 것인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명’이라는 단어에 실린 경멸과 의아함이 섞인 시선들. 류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오직 승리에 대한 순수한 열망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양 선수, 위치로! 3초 후, 경기 시작합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경기장 바닥에 새겨진 거대한 팔괘 문양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듯했다.
**3… 2… 1… 시작!**
신호와 동시에, 육중한 철산이 쿵, 쿵, 하는 굉음을 내며 전진했다. 지면을 울리는 발소리에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강철호는 초장부터 정면 돌파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역시 태산파. 정공법(正攻法)이군. 무모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류진은 비연의 조종간을 굳게 쥐었다. 비연은 철산과 달리 경쾌하게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마치 거대한 제비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유려한 움직임으로 철산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콰앙!
비연의 기체에 내장된 고성능 블레이드가 번개처럼 뻗어나가 철산의 어깨 부위를 스쳤다. 거대한 스파크가 튀었지만, 철산의 두터운 장갑에는 미미한 흠집만이 남을 뿐이었다.
“하하! 간지럽구나, 꼬마야!”
강철호의 우렁찬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류진의 조종석에 울려 퍼졌다. 비웃음과 함께 깔려오는 경고.
“그 정도 공격으로 이 철산을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리석은 것!”
철산의 거대한 팔이 류진을 향해 휘둘러졌다. 거대한 강철 벽이 날아오는 듯한 묵직한 공격. 피하지 못하면 즉시 기체가 대파될 위력이었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무모하게 정면으로 받아칠 생각은 없어. 나의 장점은 속도와 정교함!’
류진은 비연의 기동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아슬아슬하게 철산의 주먹을 피해내며, 다시금 철산의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거대한 짐승 주위를 맴도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 비연의 경쾌한 움직임과 철산의 육중한 움직임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느려! 더 빠르고 강하게 와야지!”
강철호는 일격을 놓쳤음에도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기갑, 철산은 두터운 장갑 외에도 표면에 미세한 기공 방어막을 전개하고 있었다. 웬만한 충격은 그 방어막에 흡수되어 버렸다. 류진의 블레이드가 닿기 전에 미묘하게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류진은 초고속으로 움직이며 철산의 약점을 찾았다.
‘아무리 견고한 기갑이라도, 움직임이 둔하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
비연의 광학 센서가 철산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강철호의 무공은 ‘태산중보권(泰山重步拳)’. 한 걸음 한 걸음에 천근의 힘이 실리는 권법이다. 육중한 기갑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류진은 순간적으로 비연의 기체를 공중으로 솟구치게 했다. 철산의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오르자, 강철호는 잠시 당황한 듯 반응이 늦었다.
“지금이다!”
비연의 양 팔에서 섬광과 함께 두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비연쌍검(飛燕雙劍)’. 류진의 쾌검술을 기갑에 맞춰 재해석한 무장이었다. 검의 형상이 기갑의 팔에 녹아드는 듯하다가, 섬광과 함께 길게 뻗어나왔다.
샤앙! 샤아앙!
두 자루의 검이 철산의 머리 부분과 목덜미를 동시에 노렸다. 기공 방어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관절 부위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관중석에서는 탄성과 함께 ‘해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좋아, 통했다!’
검은 철산의 목 부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파크가 격렬하게 튀고, 철산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렸다. 성공적인 일격이었다.
“크아악! 이 건방진 녀석!”
강철호가 분노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통신망을 통해 날아오는 그의 음성은 맹렬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네놈의 간교한 술수에 당할 내가 아니다! 태산압정(泰山壓頂)!”
철산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갑의 등 뒤에 장착된 거대한 추진기가 일제히 불을 뿜으며 철산을 엄청난 속도로 류진에게 돌진시켰다. 단순한 돌진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갑이 온몸을 이용해 류진을 짓누르려는 듯,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산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위압감!
‘이건… 단순한 돌격이 아니야! 태산파의 절기, 태산압정을 기갑으로 구현한 건가?’
류진의 조종석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비연의 방어막으로는 저 엄청난 충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충돌하는 순간, 기갑과 함께 자신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저 속도와 범위로는…
그 순간, 류진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비연의 이름처럼, 제비처럼 날아오르는 것. 허공으로.
“젠장, 모험이지만… 해볼 수밖에!”
류진은 비연의 모든 추진력을 하체에 집중시켰다.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오는 철산을 향해, 오히려 비연은 역방향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강물에 거슬러 날아오르는 연어처럼.
부아아앙!
경악스러운 속도로 비연이 하늘로 치솟았다. 강철호는 예상치 못한 류진의 움직임에 당황한 듯, 철산의 거대한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철산의 육중한 몸체가 허공을 가르며 허무하게 지나쳐 버렸다.
비연은 철산의 머리 위를 지나쳐, 그 등 뒤로 착지했다.
“어디를!”
강철호는 빠르게 철산을 회전시키려 했지만, 비연은 이미 그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등짝… 등짝을 보자!’
류진은 순간적으로 비연의 오른쪽 팔에 모든 내공과 기갑의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비연쌍검 중 한 자루가 엄청난 속도로 뽑혀 나왔다. 검날에 푸른빛이 휘감기며, 흡사 기계 팔이 아닌 살아있는 팔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비연난무(飛燕亂舞)!’
비연의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철산의 등 뒤를 난도질했다. 그의 쾌검술이 기갑의 움직임으로 구현되어, 눈으로 쫓기 어려운 속도로 수십, 수백 번의 참격이 쏟아졌다.
콰콰콰쾅! 파지직!
철산의 등 부분 장갑이 찢겨나가고, 내부에 있던 전선들과 유압 장치들이 파열되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철산의 기동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상당한 손상을 입은 철산의 기공 방어막도 이 난무 앞에서는 무력했다.
“크으으윽! 이… 이럴 수가!”
강철호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통신으로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비연은 다시 한 번 솟구쳐 올랐다. 등 뒤에 거대한 상처를 입은 철산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류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순간의 기회로 결정되는 무림의 섭리를, 그는 기갑 위에서도 잊지 않았다.
“끝장을 내주마! 비연… 낙화(落花)!”
하늘로 치솟았던 비연은 마치 운석처럼 엄청난 가속도로 철산의 머리 위로 곤두박질쳤다. 비연쌍검의 두 자루 검날이 섬광처럼 빛을 발하며, 철산의 약점, 조종석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콰르르르릉!
경기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철산의 머리 부분이 산산조각 났다. 조종석이 있던 자리에서 맹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고, 기갑의 잔해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거대한 강철 거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내 완전히 고개를 떨구며 쓰러졌다.
경기장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수만 관중의 시선이 쓰러진 철산과, 그 위에서 날개 짓을 멈춘 듯 정지해 있는 비연에게로 향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붉은 글씨의 ‘KO’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류진은 숨을 헐떡였다. 비연의 조종석 안은 땀으로 흥건했지만, 그의 눈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거대한 철산을 쓰러뜨린 그의 기갑, 비연은 마치 방금 날갯짓을 멈춘 제비처럼,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승자! 류진 선수!”
관중석에서는 뒤늦게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경멸에서 경외로 바뀌어 있었다.
류진은 잠시 눈을 감고 승리의 여운을 만끽했다.
‘아직 멀었어. 이건 시작일 뿐.’
그의 시선은 망가진 철산을 넘어, 경기장 너머의 거대한 탑을 향했다. 그 탑의 정상에는,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하나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강자들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다음 경기를 위해, 비연은 다시 날개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