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우연히 발견한 마법의 상자

주은은 늘 마감에 쫓기는 신세였다. 늦은 밤, 불 꺼진 방에서 컴퓨터 화면만이 홀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캐릭터들은 제멋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카락은 하늘로 솟구쳤고, 눈은 비뚤어져 있었으며, 손가락은 마치 문어발 같았다. ‘이러다간 영영 데뷔 못하고 길바닥에 나앉겠지.’ 주은은 키보드 위에 축 늘어진 채 한숨을 쉬었다. 영혼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영감이… 영감이 없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침대 위엔 먹다 남은 컵라면 용기와 웹툰 콘티가 뒤섞여 있었고, 바닥엔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난장판 속에서 과연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을 수 있을까. 주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리프레시가 필요해! 새로운 자극!”

벌떡 일어선 주은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꿉꿉한 새벽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찼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낯선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삐죽 솟아난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허름하고 고즈넉한 기운을 풍기는 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도윤 골동품.’ 붓글씨로 쓰인 간판이 왠지 모르게 끌렸다.

가게 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먼지 쌓인 앤티크 가구들, 빛바랜 그림들, 정체 모를 도자기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주은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서 오세요.”

안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고서적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와이셔츠 차림에 팔뚝을 걷어 올린 그는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날카로운 콧대와 짙은 눈썹, 무엇보다 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비율의 얼굴. 주은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내 웹툰 남주보다 더 잘생겼잖아…’

남자는 미동도 없이 주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주은은 괜히 찔려 어색하게 웃었다.

“아, 저기… 구경 좀 할게요.”

“네.”

단답형 대답과 함께 남자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역시 차가운 도시 남자…’ 주은은 괜히 머쓱해져 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딱히 살 생각은 없었지만, 이색적인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주은의 눈에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선반 구석,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작고 투박한 상자였다. 어두운 갈색 나무 위에는 용인지 봉황인지 모를 무늬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상자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눈길이 갔다.

“이거 얼마예요?”

주은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상자는 예상보다 가벼웠고, 나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오래된 향이 풍겼다.

남자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천 원.”

“네? 오천 원이요?” 주은은 너무나 저렴한 가격에 놀랐다. “흠집도 있고… 오래돼서 그런가요?”

“오래된 게 골동품이죠.” 남자는 드디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주은은 놓치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 싸게 내놨습니다.”

왠지 모르게 서둘러 말을 맺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거 살게요!”

주은은 쾌활하게 오천 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이내 돈을 받고 상자를 포장해 주었다. 그의 손길은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조심히 다루세요.”

“네?”

“그냥… 오래된 물건이니까요.”

남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주은은 어리둥절했지만, 기분 좋게 상자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

집으로 돌아온 주은은 상자를 깨끗하게 닦았다. 먼지가 걷히자 낡은 나무 상자는 은은한 광택을 띠기 시작했다. 희미했던 무늬도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으로 살살 문지르자, 오래된 나무의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음, 꽤 예쁘네? 액세서리함으로 써볼까.”

주은은 상자 뚜껑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금장치도 없는데 왜 안 열리는 거지? 답답함에 주은은 상자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뚜껑이 스르륵 열렸다.

상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주은은 실망감에 한숨을 쉬었다. “뭐야, 텅 비었잖아? 괜히 기대했네.”

텅 빈 상자를 내려다보던 주은은 문득 허기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제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냉장고엔 편의점 도시락밖에 없었다. ‘아, 갑자기 매콤한 떡볶이가 먹고 싶다. 밀떡에 어묵 많이 넣은 걸로!’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좁은 원룸에서 떡볶이 냄새가 진동했다. 주은은 코를 킁킁거렸다. ‘이 냄새는…?’ 거실을 두리번거리자, 테이블 위에 웬 떡볶이 한 팩이 놓여 있었다. 갓 조리한 듯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 뭐야? 내가 시켰나? 아니, 시킨 적 없는데?”

주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떡볶이에 다가갔다. 정말 매콤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주은은 망설이다가 포장 용기를 살짝 들춰보았다. 정말 밀떡에 어묵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딱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 떡볶이였다.

“와, 대박. 서비스인가? 로또 맞았네!”

의아했지만, 배고픔에 장사 없는 법. 주은은 떡볶이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한 팩을 다 비웠다. 떡볶이의 매콤함 때문인지,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때, 현관문에서 ‘똑똑’ 소리가 들렸다. 주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까 그 골동품 가게 남자가 서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시크했고, 그의 손에는 방금 주은이 먹었던 떡볶이와 똑같은 포장 용기가 들려 있었다.

“저… 제 떡볶이가 혹시 여기로 잘못 배달되었는지 해서요.”

남자의 말에 주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떡볶이요?”

남자는 주은의 손에 들린 텅 빈 떡볶이 용기를 흘긋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드셨나요?”

주은은 황급히 뒤로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그게… 배달 온 건 줄 알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방금 시킨 건데… 배달원이 착각한 모양이네요. 저희 가게 주소가 비슷해서 가끔 이런 일이…”

주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에, 남의 떡볶이를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버리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물어드릴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주은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드셨다니 뭐…” 그는 왠지 모르게 한숨을 다시 삼키는 듯 보였다. “그보다…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네? 이상한 일이요?” 주은은 문득 떡볶이가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이상한 일인가? 내가 원하자마자 나타난 떡볶이?’

“아니요, 별다른 건 없었어요.” 주은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괜히 이상한 말을 했다가 미친 사람 취급받을까 봐 두려웠다.

남자는 주은의 집 안을 힐끗 보더니, 다시금 상자를 찾는 듯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텅 빈 떡볶이 용기를 다시 한번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조심하세요.”

“네?”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지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은의 귀에는 띵- 하는 알림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웹툰 콘테스트 마감 알림이었다. ‘아! 맞다! 오늘이 마감이었지!’

그녀는 남자를 뒤로 한 채 문을 쾅 닫고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잊고 있었던 마감 기한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역시 마감은 언제나 날 배신하지 않아!’

***

그날 밤 이후로, 주은의 일상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웹툰 마감을 위해 밤샘 작업을 하던 그녀는 ‘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컵에 담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바로 그녀의 책상에 나타났다. 주은은 처음엔 자신이 졸려서 헛것을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컵 속 얼음이 딸그랑거리는 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다음 날,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 스케치를 찢어버리며 ‘이런 지저분한 그림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방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찢어진 스케치들이 바람 한 줄기 없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주은은 경악했다. 이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기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그 낡은 나무 상자를 들여온 뒤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그 남자가 했던 말?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지는 세상은…’

‘아니야, 설마. 영화 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없잖아!’

주은은 애써 현실을 부정했지만, 그녀의 일상은 점점 더 마법 같은 기이함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그 ‘도윤 골동품’의 남자가 자꾸만 그녀의 주변에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주은이 동네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콘티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한숨을 쉬며 ‘내 웹툰 남주가… 현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며 도윤이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테이블 바로 옆자리에서 커피를 시켰다.

주은은 화들짝 놀라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분명히 저 사람이랑 상자랑 관련이 있어!’

어느 날은 주은이 공원에서 산책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번엔 좀 더 개성 강한 빌런을 만들고 싶어. 딱 봐도 능글맞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중년 빌런…’ 그녀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서 인파가 웅성거렸다. 시선을 돌리자, 벤치에 앉아있던 도윤이 강아지에게 과자를 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중년의 남자 한 명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남자의 생김새는 주은이 방금 상상했던 ‘미중년 빌런’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제발! 더 이상은 그만! 이쯤 되면 너무하잖아!’

주은은 도윤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도윤은 그녀를 발견했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주은은 도윤을 찾아갔다. 골동품 가게 문을 열자, 도윤은 역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저기요!”

주은의 목소리에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혹시 제가 그 상자 때문에 이상해진 건가요? 아니면 혹시 당신이… 제 주변을 따라다니는 스토커…?” 주은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윤은 피식,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주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스토커라니요. 오해십니다. 그리고 제가 상자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상자가 당신에게 반응하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윤은 책상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주은이 산 것과 똑같이 생긴 상자였다. 다만, 그의 상자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건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소원 상자’입니다. 아주 오래된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죠. 소유자의 마음속 깊은 염원이나 강렬한 감정에 반응해서 현실로 구현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주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엔 작은 염원부터 시작합니다. 떡볶이처럼요.” 도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점차 소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무의식적인 생각까지도 현실로 만들어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혼란스러운 일들만 가득해질 겁니다.”

“그럼 제가 그 떡볶이를…!”

“네. 당신이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떡볶이를 상자가 구현해낸 겁니다. 제 떡볶이는 말 그대로 운 나쁘게 그 타이밍에 배달이 겹쳤던 거고요.”

주은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라진 스케치, 그리고 심지어 ‘내 웹툰 남주’와 ‘미중년 빌런’까지!

“그럼 제가 산 상자는 왜 저에게 온 거죠? 그리고 당신은 왜 자꾸 제 주변에 나타나는 거예요?”

도윤은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산 상자는 사실 제가 실수로 팔았던 겁니다.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인데, 보관함 구석에 있다 보니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걸 다시 찾기 위해 당신을 따라다닌 겁니다. 상자의 힘이 당신에게 발현되는 걸 감지했으니까요.”

“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주은은 살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말해봐야 믿으셨겠습니까? 미신 취급했을 테죠. 그리고 상자의 힘은 오직 소유자의 감정에 반응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이 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지켜본 겁니다.”

도윤의 설명에 주은은 혼란스러웠다. 마법의 상자라니,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럼 이 상자… 다시 가져가세요!” 주은은 상자를 내밀었다. 너무나도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한 힘에 어깨가 무거웠다.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자는 당신을 소유자로 택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상자의 힘을 각성시켰으니까요. 이제 상자를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 힘은 당신에게 남아있을 겁니다.”

“그럼 저는 평생 이렇게 이상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는 거예요?” 주은은 좌절했다.

“아니요. 제게 방법을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도윤은 주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요.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네. 저는 상자의 힘을 제어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상자의 힘이 발현되는 것에 이미 익숙하니까요.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주은은 도윤의 제안에 망설였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말에는 어딘가 모를 설득력이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 배우면 되는 건가요?”

“네. 제가 당신의 마법 선생님이 되어드리죠.” 도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에 주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젠장, 너무 잘생겼잖아. 이게 바로 웹툰 남주가 현실에 나타나는 마법인가…’

***

그날부터 주은의 일상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도윤은 매일같이 주은의 집으로 찾아왔다. 낡은 상자를 중심으로 마법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자, 이번에는 생각만으로 컵을 들어 올리는 연습입니다. 집중하세요.”

“흐읍… 으읍… 안 돼요! 컵이 너무 무거워요!”

주은이 온 얼굴에 힘을 주고 낑낑거리는 동안, 컵은 바닥에 찰싹 붙어 미동도 없었다. 반면 그녀가 ‘아, 시원한 오렌지 주스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텅 비어있던 컵에 주스가 가득 차올랐다.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이성적으로, 정확한 의지를 가지고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주문이요? 무슨 주문을요?”

“상상은 자유입니다. 자신만의 주문을 만들어보세요. ‘레비오사’ 같은 거라도 좋습니다.”

주은은 결국 자신만의 주문을 만들었다. ‘영차! 뿅!’ 그녀가 양손으로 상자를 들고 외치자, 컵은 겨우 1cm 정도 떠올랐다가 쿵 하고 떨어졌다.

도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겠군요.”

그의 웃는 얼굴은 생각보다 더 멋있었다. 주은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법 훈련은 늘 이렇게 좌충우돌이었다. 주은이 집중하지 못하거나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면, 엉뚱한 마법이 발동했다.

한번은 도윤이 마법 제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주은은 속으로 ‘아, 이 잔소리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도윤의 입에서 갑자기 거품이 보글보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으읍! 읍읍읍!”

도윤은 당황한 얼굴로 거품을 뱉어냈다. 주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았다.

“크큭…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도윤은 험악한 얼굴로 주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내일은 마법으로 방 청소하는 연습을 시켜야겠습니다.”

“네? 안 돼!”

또 한 번은, 주은이 웹툰 콘티를 짜다가 막힌 부분에서 ‘이 장면에서 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삭막했던 주은의 원룸 벽지에서 탐스러운 장미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송이가 아니라 벽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도윤은 깜짝 놀라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미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실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단합니다, 주은 씨. 이렇게 강력한 구현은 저도 쉽게 해낼 수 없는데.”

“헉, 제가… 제가 한 거예요?” 주은은 자신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도윤의 칭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소동 속에서 주은과 도윤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딱딱하고 차가웠던 도윤은 주은의 엉뚱함과 순수함에 조금씩 무장해제되었다. 주은은 도윤의 깊이 있는 지식과 차분한 설명에 의지했고, 그의 예상치 못한 다정한 모습에 설렘을 느꼈다.

어느 날 밤, 마법 훈련을 마치고 도윤이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주은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저… 저는 이 마법이 조금 무서웠어요. 제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면… 과연 좋은 일만 있을까 싶어서요.”

도윤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은을 돌아보았다. “그건 당신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상자는 거울과 같습니다. 당신의 내면을 그대로 비춰주죠. 불안과 두려움이 있으면 혼란을, 선한 의지와 용기가 있으면 기적을 만들어낼 겁니다.”

“기적…”

“네. 그리고 혼자 감당하기 힘들 때면 언제든 저를 찾아도 좋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그의 말에 주은은 따뜻한 위로를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도윤을 보았다. 달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웹툰 남주보다 더 멋있는 그의 얼굴이, 이제는 마냥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저는 도윤 씨가 제 옆에 있는 게 좋아요.” 주은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주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저도… 당신이 제 옆에 있는 게 좋습니다.”

그의 손길에 주은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주은의 머릿속에 갑자기 ‘도윤 씨랑 손잡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낡은 나무 상자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도윤의 손이 주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을 감싸 쥔 빛은 마치 별똥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마법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했지만, 이제 주은에게는 두렵지 않았다. 도윤과 함께라면, 어떤 마법 같은 일도 기적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은은 마침내 그동안 막혔던 웹툰 스토리를 술술 풀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새로운 웹툰은 ‘마법의 상자를 주운 여자와 그 마법을 감시하는 남자’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독자들은 신선한 소재와 달달한 로맨스에 열광했다. 물론, 웹툰 속 남주는 도윤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상자를 통해 소원을 빌었을 때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은 주은의 일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주은의 삶은 더 이상 마감에 쫓기는 고단한 일상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세상은 오래된 상자와 수상한 남자,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마법으로 가득 찬, 가장 로맨틱하고 코믹한 나날들이었다.